고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373
한자 古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김기섭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역사와 문화.

[개설]

충청남도 서천군은 금강 하구의 교통 요지로 초기 국가 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4세기 백제의 영역으로 편제되었으며, 웅진·사비 도읍기에 왕도 인근의 지방 세력 거점이었다가 백제 멸망 후 신라의 군(郡)과 현(縣)으로 편제되었다.

[고대의 기준]

한국사의 고대는 철기 시대에 해당한다. 언제부터 철기를 만들고 썼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략 기원전 4세기경에는 철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때부터 기원전·후 시기까지는 오히려 청동기를 더 많이 사용하였으므로 고고학계에서는 초기 철기 시대라고 부르며 기원후의 본격적인 철기 시대와 구별한다.

[초기 국가 시대의 마한]

기원후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마한·진한·변한의 소국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서천 지역은 마한에 속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중국 역사서 『삼국지』 한전(韓傳)에 실린 마한 50여 국 중 비미국(卑彌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아림국(兒林國) 등을 서천이나 인근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마한 소국과 관련하여 서천 오석리 유적의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 및 움무덤, 돌널무덤, 종천면 당정리에서 조사된 23기의 주구토광묘, 마서면 송내리에서 조사된 수혈 주거지 28기 및 경작지 2곳, 마서면 한성리에서 조사된 도랑 유구[溝狀 遺構]와 적석 유구(積石 遺構) 등에 주목하기도 한다. 시초면 봉선리에서는 주거지·움무덤·독무덤 등 다양한 유적이 조사되었는데, 환두대두를 비롯하여 철제 무기류가 다수 출토되어 마한부터 백제 시대에 상당한 정치 세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마산면 지산리에서도 마한부터 백제 시대의 주거지 70여 기와 수혈 유구가 조사되었으며, 장항읍 옥산리의 움무덤 3기에서는 한성 도읍기의 토기를 비롯하여 철정·굽은옥·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통하여 늦어도 4세기경에는 서천 지역이 백제의 영역으로 편제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 시대의 백제]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웅주(熊州)에 속한 가림군(嘉林郡)의 마산현(馬山縣), 서림군(西林郡), 비인현(庇仁縣) 등의 이름이 실려 있다. 마산현은 삼국 시대 백제부터 고려 시대까지 계속 사용한 이름으로 현재의 서천군 한산면·마산면·기산면·화양면 일대에 해당하며, 서림군은 백제의 설림군(舌林郡)을 신라 경덕왕 때 고친 이름으로 현재의 서천군 서천읍·장항읍·마서면·시초면·문산면 일대에 해당한다. 비인현은 백제의 비중현(比衆縣)을 신라 경덕왕 때 고친 이름으로 현재의 서천군 비인면·판교면·종천면·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의 동성왕이 501년 11월 사비 서쪽의 벌판에서 사냥하다가 큰 눈에 막혀 마포촌(麻浦村)에서 묵던 중 자객에게 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마포촌을 마산현과 연관 지어 한산면에서 마산면 부근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성왕 때인 486년 가을 7월에 우두성(牛頭城)을 쌓았다는 기록에 대하여서도 우두성을 서천 건지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서천 지역에서 발견된 백제 유적은 대개 웅진·사비 도읍기에 해당한다. 시초면 서천 봉선리 유적에서는 2003년에 백제 시대 주거지 39기, 저장공 93기, 무덤 59기 등이 조사되었는데, 주거지는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이 많고, 무덤은 대체로 5세기~6세기 초반으로 편년되었다. 2016년 조사된 인근의 제의 유적은 기존에 풍정리산성으로 알려져 있던 곳인데, 제단으로 추정되는 원형의 단 시설과 목곽고, 주거지, 건물터, 수혈 유구 등이 확인되었고, 제의 관련 백제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가로 500㎝, 세로 470㎝, 잔존 깊이 340㎝ 크기의 목곽고 안에서는 소·멧돼지·사슴 등의 동물 뼈와 복숭아씨·박씨·밤 등의 식물 열매들이 세발그릇[三足器]·굽다리접시[高杯]·그릇받침[器臺] 등의 토기류와 함께 출토되었다. 목곽고의 용도는 의례와 관련한 집수 시설로 사용 시기는 한성기 말부터 웅진기로 추정한다. 화양면 추동리에서 조사된 돌방무덤은 내부에서 금제 꽃모양 꾸미개[花形裝飾]과 금제 달개[瓔珞]가 출토되어 사비 도읍기의 상당한 권력자 무덤으로 추정한다. 이외에 마서면 옥북리, 서천읍 신송리, 종천면 당정리, 비인면 칠지리, 기산면 화산리 등 서천군 곳곳에서 백제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또한 서천읍서천남산성, 마서면봉남리산성, 종천면장구리산성산천리산성 등 성곽 유적이 다수 분포하는데, 서천남산성 발굴 결과 최하층에서 백제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의 중요한 지역 거점성으로 추정한다. 또, 판교면 금덕리에서 발견된 백제 와요지는 웅진·사비 지역에 기와를 공급한 생산 기지로 추정한다. 종천면 신검리 요지 유적에서도 백제 사비 도읍기 건물터 1기와 함께 토기 가마 2기, 기와 가마 7기, 그리고 공방지 등이 발견되었다. 건물터는 1탑1금당식의 사찰로 추정한다. 같은 곳에서 ‘운갑사(雲岬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통일 신라 기와, ‘개복사(開福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고려 시대 기와도 발견되어 통일 신라부터 고려 시대까지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 이후]

충청남도 서천군 일대는 660년 신라·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략할 때 주요 교통로였다. 660년 7월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대군이 백강(白江) 하구에 상류한 뒤 사비도성으로 접근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무왕의 조카로 알려진 귀실복신(鬼室福信)이 승려 도침(道琛) 등과 함께 임존성(任存城)에서 백제 재건 투쟁을 벌였으며, 얼마 뒤에는 근거지를 주류성(周留城)으로 옮기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하여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충청남도 연기군·홍성군·서천군 등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서천군으로 추정하는 견해는 한산면서천건지산성서천 추동리 유적, 비인면관적곡산성, 기산면한산면 경계의 영모리산성 등에 주목한다.

백제 부흥군은 663년 8월 27일 백강 어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왜의 군선 1,000척이 당나라 군선 170척에 격파당하고 9월 7일 주류성마저 나당 연합군에게 항복함으로써 사실상 몰락하였다. 백제 부흥 운동이 끝난 뒤 서천 지역은 한동안 당나라가 지배하였으나 670년부터 7년간 이어진 나당전쟁을 거쳐 마침내 신라의 행정 구역으로 편제되었다. 특히, 676년 11월 기벌포전투(伎伐浦戰鬪)에서 신라 수군이 당나라 수군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신라가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는 686년(신문왕 6) 마산현을 비롯하여 4현을 현재의 부여·서천·예산·당진 지역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757년(경덕왕 16) 지방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백제의 설림군서림군으로 고치고 아래에 남포현(藍浦縣)과 비인현을 두었으며, 마산현을 가림군에 속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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