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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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伎伐浦戰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정의]
676년 11월 충청남도 서천군의 기벌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
[개설]
기벌포전투(伎伐浦戰鬪) 는 나당전쟁(羅唐戰爭) 막바지인 676년(문무왕 16) 11월 충청남도 서천군 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이다. 신라는 당나라와 22회의 전투를 벌여 적군 4,000명의 목을 베었다고 할 정도로 크게 이겼다. 기벌포전투로 인하여 당나라 군대가 완전히 퇴각하고 신라군이 서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역사적 배경]
660년 7월 백제 의자왕은 신라와 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항복하였고, 668년 9월에는 고구려의 보장왕이 항복하였다.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신라와 당나라가 벌인 전쟁을 나당전쟁이라고 부른다. 나당전쟁은 대략 670년경부터 본격화하여 여러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에 따르면, 675년 9월 당나라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군대는 신라의 천성(泉城)을 공격하였다가 1,400명이 사망하고 병선 40척을 빼앗겼다. 이어 9월 29일 당나라 장군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매초성(買肖城)에 주둔하였는데,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면서 말 3만 380필과 수많은 병기를 빼앗겼다.
[경과]
676년 11월 신라의 사찬(沙飡) 시득(施得)은 군대을 이끌고 설인귀의 당나라 군대와 소부리주(所夫里州) 기벌포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후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회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4,000명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소부리주의 중심지는 현재의 충청남도 부여군이므로 기벌포는 금강 하구, 특히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결과]
기벌포전투 의 경과에 대하여서는 『구당서(舊唐書)』에 설인귀가 상원(上元) 연간[674년 8월~676년 11월]에 어떤 일로 죄를 지어 상주(象州)로 유배갔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전투 시점을 675년 11월로 조정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반면 시점을 조정하기보다 설인귀가 아닌 다른 장수가 당나라 군대를 이끌었다고 조정하여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기벌포전투 이후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 기록이 전혀 없으므로 기벌포전투를 마지막으로 당나라 군대가 물러갔으며 신라 수군이 서해 제해권을 장악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의의와 평가]
기벌포전투 는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로, 크고 작은 22회의 전투 동안 양쪽 군대가 정면으로 맞선 게 아니라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고 신라군이 뒤쫓는 형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