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의 문화를 세계로, 국가무형유산 한산모시짜기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015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에서 모시풀에서 얻은 모시실을 전통 베틀을 이용하여 전통적인 방식으로 직조하는 기술.

[한산모시의 유래와 역사]

모시풀은 쐐기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원줄기는 1.5~2m이고, 7~8월 담녹색 꽃이 이삭 모양으로 잎겨드랑이에 달린다. 상부에는 암꽃이 피고 하부에 수꽃이 피는 자웅동주(雌雄同珠)이다. 모시는 모시풀 줄기의 속껍질에서 섬유를 뽑아 만든다. 모시풀은 보통 1년에 3회 수확하는데 초수는 5월 말에서 6월 초, 2수는 8월 초에서 8월 하순, 3수는 10월 초에서 10월 하순이다. 수확 시기가 이르면 섬유가 연하고 늦으면 거칠어서 8월에 수확하는 모시가 가장 좋다고 한다.

한산에서 모시가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구전으로 전하는 한산모시의 유래는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전에 따르면 신라 때 한 노인이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건지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모시풀을 발견하고, 모시풀을 집으로 가져와 재배하면서 모시짜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문헌에는 이미 삼한 시대 때부터 모시를 직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한 지역에서는 길쌈으로 베를 짜 왔으며 일상복으로 베로 만든 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뿐 아니라 변한과 진한에서는 광폭세포(廣幅細布)[폭이 넓은 고운 포]를 직조하였고, 주변 강대국에 변한포(弁韓布) 등을 진상품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삼한 시대 마한에 속하였던 한산은 타 지역에 비하여 우수한 모시를 생산할 수 있는 유리한 자연환경과 풍토, 그리고 뛰어난 직조 기술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산의 기후와 토양이 길러 낸 모시]

한산에서 우수한 모시를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모시풀의 생육(生育)에 적합한 기후와 풍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양질의 모시를 재배하는 주요 조건은 온도와 습도, 강우량, 바람, 서리 등의 기후 환경과 토양이다. 모시풀은 줄기와 잎이 서리에 약하고, 줄기는 바람에 부러지기 쉽다. 따라서 풍해(風害)를 입지 않아야 하고 일조량이 풍부하며, 배수가 잘되는 사질토양(沙質土壤)에서 잘 자란다.

한산을 중심으로 한 서천 지역은 차령산맥 남단에 위치하여 금강의 줄기가 서해로 접어드는 길목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염분을 머금은 해풍과 나지막한 산들 사이로 불어오는 골바람은 양질의 모시를 생산하는 데 더없이 좋은 자연환경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각 지역을 대표하는 토산물 중에 논보다 이로움이 10배나 되는 작물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서도(西道)[황해도·평안도]의 담배[煙草], 북도(北道)[함경도·평안도]의 삼밭[麻田], 한산(韓山)의 모시밭, 전주(全州)의 생강밭, 강진(康津)의 고구마밭, 황주(黃州)[황해도]의 지황(地黃)밭은 모두 상지상(上之上)[첫째 급] 논과 비교하여도 그 이로움이 10갑절이나 된다.”

조선 시대 모시의 주산지인 저산팔읍 중에서도 한산의 모시를 제일로 꼽고 있는 것이다. 한산모시의 특성과 우수성은 세저포(細苧布), 광폭세포(廣幅細布), 문저포(紋苧布), 사저포(紗紵布), 저포교직(紵布交織) 등에서 찾을 수 있다.

① 세저포: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곱게 짠 세모시이다. 현재 한산에서 생산되는 모시의 포폭은 29~36㎝이며, 최고로 곱게 짤 수 있는 세모시는 12~15새이다. 그러나 현재 15새는 전승이 단절된 상태이고, 12새에서 9승 사이를 짠다.

② 광폭세포: 폭을 넓게 해서 짠 모시이다. 광폭세포는 삼국 시대 문헌에도 나타난다. 당시 예측되는 천 폭의 범위는 50㎝ 내외, 또는 60~78㎝로 추측된다. 현재 한산모시는 62㎝까지 짜고 있다.

③ 문저포: 고려 시대 문헌 기록에는 전하지만 관련 유물이 없어 제직법은 알기 어렵다. 고려 후기 직물 중에 화문(花紋)으로 된 생초 직물처럼 사직(絲織)과 평직(平織)으로 교차된 형태로 제직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④ 사저포: 사직으로 짠 고급 모시로 추정된다. 중국에 공물(貢物)로 보낸 물품의 하나이다. 당시 사직으로 짠 견직물과 동일한 기법으로 제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⑤ 저포교직: 두 가지 이상의 실, 즉 모시와 다른 직물의 실을 섞어서 직조한 것이다. 모시와 마[苧麻交織(저마교직)], 명주와 모시[絲紵交織(사저교직)], 무명과 모시[綿紵交織(면저교직)] 등 다른 천연 섬유와 교직을 행하여 왔다. 일반적으로 사저교직은 경사올은 명주실, 위사올은 모시실로 짰으며, 면저교직은 춘사(春紗)라 하여 주로 경사올은 무명실로 하고, 위사올은 모시실로 짰다.

[한산모시짜기의 품앗이 문화와 공동체 의식]

한산모시짜기 는 지역 사회에서 공동 작업을 통하여 상부상조하는 미풍양속을 크게 진작시켰다. 여럿이 함께 모여 모시를 짜기 위하여 마련하였던 ‘모시방’이 좋은 예이다. 지난날 모시를 많이 생산하는 집은 모시방이 갖추어져 있었고, 나이가 비슷한 동네 처녀들은 모시방에 모여 수다를 떨거나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모시를 짰다.

모시짜기는 모시풀 재배와 수확, 태모시 만들기, 모시째기, 모시삼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모시 표백하기를 거쳐야 비로소 모시 베로 탄생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한산모시짜기 특유의 제직 기술과 전통 지식이 용해되어 있다. 태모시를 가늘게 쪼개어 굵기를 일정하게 하는 모시째기를 통하여 세저(細苧), 중저(中苧), 막저로 원료가 구분된다. 상저(上苧)는 올이 가장 가늘고 고운 세모시로서 한산세모시는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고 가늘고 곱기로 유명하다. 또한 올의 균일도는 모시삼기에서 결정되는데, 한산의 모시삼기 기술은 우수하여 균일도가 일정하다.

모시를 짜는 과정에서 효율적인 작업을 위한 모시두레와 품앗이 관행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모시두레는 모시굿을 빨리 만들기 위하여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조직하였다. 모시굿은 모시째기와 모시삼기 과정을 거쳐 생산된 모시실을 말한다. 이외에 한가위를 앞두고 명절에 필요한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두레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보통 4명이 함께하는데, 장에 나가 태모시 한 근을 사서 나눈 뒤 각자 째고 삼아서 모시굿을 만들고, 공동 작업으로 짠 모시를 팔아 동일하게 분배하였다.

품앗이는 모시삼기와 모시매기를 할 때 이루어졌다. 모시를 짤 때 다른 작업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모시삼기와 모시매기는 일손이 많을수록 일이 한결 수월하기 때문에 4~5명이 한 집씩 번갈아 가며 하여 주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였다. 마을 주민이 한 장소에 모여 서로 협력하여 일하는 전통은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며 공동체 문화를 발전시켰다. 한산 지역의 모시 공동체 문화는 서천의 저산팔읍 길쌈놀이가 탄생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저산팔읍 길쌈놀이는 한산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베 짜기에 관한 민속 놀이이며 여성을 위한 축제이자 공동체 놀이이다. 서천 저산팔읍 길쌈놀이는 1991년 7월 9일 충청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임금과 백성이 즐겨 입은 모시옷]

한산모시는 고려 시대부터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대외 교역의 주요 물품이자 진상품이었다. 특히 섬세하고 고운 세모시는 최상품으로 꼽혀 명나라에 공물로 바쳐졌다. 한산은 백제 시대 이래 세모시가 생산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혜종(惠宗)[912~945] 때 진나라에 보낸 세모시를 마저여설(麻紵如雪), 즉 모시와 삼의 재질감이 눈과 같다고 표현하였고, 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실이 너무 가늘어서 매미 날개처럼 투명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40승(升) 백저포(白苧布), 30승 저포(苧布) 등의 기록이 보인다. 승은 ‘새’라고도 하며 올의 굵고 가는 짜임새를 세는 단위이며 1승은 경사 80올을 말한다. 따라서 30승 포는 직물 폭 간에 2,400올의 경사가 정경(整經)되어 제직된 것이다. 당시 옷감의 폭과 오늘날의 폭을 비교하면 18승 이상의 포가 되므로 매우 곱게 짠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기술 또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엿볼 수 있다. 한산세모시는 12~15새를 최상의 세모시로 여기는데, 현재 15새는 전승이 단절된 상태이다.

1123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온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고려는 모시[苧]와 삼(麻)을 스스로 심어 사람들이 베옷을 많이 입는다. 제일 좋은 것을 시(絁)[가늘게 짠 것]라고 하는데, 깨끗하고 희기가 옥과 같고 폭이 좁다. 왕과 귀족이 다 입는다.”

고려 시대 의복은 모시와 삼베옷이 주류를 이루었다. 고려 시대 때는 임금부터 일반 서민들까지 애용할 정도로 모시옷은 보편적으로 활용되었다. 고려 시대 모시의 생산은 국가에서 관장하는 관영 수공업과 민간 수공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천을 짜는 일은 잡직서(雜織署)에서 맡아 하였고, 염색은 도염서(都染署)에서 주관하였다. 국가에서는 모시 생산을 장려하였는데 모시는 화폐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 물물교환이 가능하였고, 아울러 중국과의 외교에서 주요한 공물(貢物)이자 교역품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도 모시는 주요 교역품이자 진상품이었으며 나라의 공신들에게 내리는 하사품의 하나였다. 세종(世宗)[1397~1450] 대에는 고급품인 백저포(白苧布)를 관복으로 사용하였다. 벼슬의 지위를 막론하고 여름철 관복은 모두 모시와 삼베가 통용되었다. 국가에서 주관하는 제사, 즉 사직단, 종묘, 선농단, 선잠(先蠶) 및 산천과 바다의 신에게 제사할 때 바치는 폐백(幣帛)에 모시가 사용되었다. 예종(睿宗)[1450~1469] 대에는 국가에서 필요한 모시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임천·한산 등의 생저(生苧)를 공물(公物)로 상정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모시는 특히 양반 상류 계층이 선호하는 옷감이었으나 다양한 계층에서 수요가 높았다. 임금이 내전에서 입는 평상복을 모시로 지었고 양반가 부녀들은 모시로 적삼과 치마를 해 입었다. 순백색 모시의 섬세함과 단아함은 옷으로 지었을 때 맵시가 우아하여 사대부가의 기품을 돋보이게 하는 고급 옷감으로 인기가 높아 순백의 흰색 외에도 쪽염·치자염·홍화염 등 다양한 색으로 염색을 드려 한껏 멋을 내기도 하였다.

또한 모시는 의례복을 비롯하여 상복과 군복에도 사용되었고 일반 백성들은 여름철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염색하지 않은 삼베나 모시로 만든 옷을 입었다. 모시의 수요가 점점 높아지면서 한양에는 육주비전(六注比廛)의 하나인 저포전(苧布廛)이 개설되었고, 지방은 고을 단위의 장시를 중심으로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국가무형유산과 인류 무형 문화유산 대표 목록 한산모시짜기]

세모시 옥색 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1946년 발표된 김말봉 작사, 금수현 작곡의 가곡 「그네」이다. 아스라한 노랫말 속에는 모시의 두 가지 특성이 녹아 있다. 하나는 세모시이고, 다른 하나는 모시옷을 입는 계절이다. 가장 가늘고 고운 세모시는 한국의 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여름 전통 옷감이다. 모시옷을 즐겨 입었던 옛사람들은 날씨가 무더워지는 5월 단오 무렵부터 입기 시작하였다. 세모시 옥색 치마를 입은 처녀가 단옷날 그네를 뛴 이유이다.

‘세모시의 고장’ 서천군에서는 지역 특산품인 한산모시의 전통을 보존하기 위하여 1993년 한산모시관을 건립하여 한산모시짜기의 계승과 전수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한산모시짜기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알리기 위하여 1989년부터 매년 한산모시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한산모시짜기는 1967년 1월 16일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1년에는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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