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13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범

[정의]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던 조선 시대 시장.

[개설]

장시 는 15세기 말 전라도 지역에 처음 개설되었다. 장시는 행상이 모여서 교역하고 물러가는 것을 말한다. 조선 후기 들어서 전국적으로 장시 개설이 확산되었다. 1830년대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052개의 장시가 개설되어 있었다. 당시 군현의 수와 비교하여 본다면 1개 군현에 평균 3개 이상의 장시가 개설된 셈이다. 장시는 보통 5일 간격으로 열렸으며, 각 장시 사이의 거리는 대체로 30~40리[약 12~16㎞] 떨어져 있었다. 장시를 오가는 행상은 대부분 보부상이었기 때문에, 보부상이 하루 걸어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장시가 들어섰다. 장시는 인근 지역 주민들이 필요한 물품을 보부상을 통하여 공급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서천 지역의 장시저산팔읍상무사 소속의 보부상을 중심으로 거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서천 지역의 장시 발달 배경]

전근대 시기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수운이었다. 대규모의 물품을 운송하기 위하여서는 배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였다. 따라서 강과 해안을 중심으로 다수의 포구가 발달하였고, 이러한 포구를 중심으로 내륙으로 연결되는 장시망이 형성될 수 있었다. 내륙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강과 바다를 통하여 다른 지역으로 운송되었고, 반대로 소금과 해산물은 강과 바다를 통하여 내륙 깊숙이 이송되었다. 그러므로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은 수운 교통의 이점이 있었다. 그중 한 곳이 서천 지역이다.

서천군은 서해과 금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 농산물과 해산물이 교류하기 쉬웠다. 금강을 끼고 상업이 활성화되었고, 서천 지역의 특산물인 모시가 생산되면서 장시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서천 지역의 포구와 나루는 한산군에 9곳, 서천군에 11곳이 있었다. 서천 지역에 한산모시가 다수 거래되면서 한산장, 서천장, 비인장이 개설되었다.

[서천 지역의 장시]

금강 유역에 개설된 장시를 보면 임천장은 1·6일, 홍산장은 1·6일, 한산장은 1·6일, 함열장은 3·8일, 서천장과 비인장은 2·7일로 주변 군현의 장시와 개시일이 겹쳤다. 장시일이 동일한 경우에는 해당 장시와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각각 개설 일자가 달라지면서 점차 하나의 장시망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서천 지역의 장시망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강경포였다. 서천과 한산의 상인들은 강경으로 올라가는 물자를 미리 확보하여 상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는데, 그러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 길산장이다.

19세기 서천과 한산을 중심으로 한산읍장[1·6일], 서천읍장[2·7일], 신장[3·8일], 길산장[4·9일], 장등장[4·9일], 대조장[5·10일]이 독자적인 형태의 장시망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중심에 길산장이 있었다. 길산장을 통하여 유입된 외부의 물품이 서천 지역 내륙으로 운송되었다. 특히 서천 지역에는 한산모시를 근간으로 경제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형성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저서에서 한산 지역의 모시야말로 논농사 수입의 10배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즉, 서천 지역의 한산모시는 충청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진 상품 작물로 인정받고 있었던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신경준(申景濬)의 기록에 따르면 한산군에는 읍내장과 신장, 서천군에는 읍내장과 길산장, 대조장, 비인군에는 읍내장, 종천장, 판교장 등 모두 8곳의 장시가 개설되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