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3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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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 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오치훈 |
[정의]
918년 개국에서 1392년까지 고려 왕조 시기 충청남도 서천군의 역사.
[개설]
고려 시대(高麗 時代) 서천 지역은 983년(성종 2) 설치된 12목 가운데 공주목에 편성되어 서림군(西林郡), 한산현(韓山縣), 비인현(庇仁縣)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서림군은 백제의 설림군이었다가 757년(경덕왕 16) 서림군으로 바뀌었다. 고려 건국 이후에도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다가 1018년(현종 9) 가림현에 속하게 되었으며, 1314년(충숙왕 1) 고을 사람 이언충(李彦忠)이 공을 세워 서주(西州)로 승격되었다. 한산현은 백제의 마산현(馬山縣)으로 통일 신라의 가림군에 속하였으며, 고려 건국 이후 여전히 가림군에 속하면서 한산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175년(명종 5) 감무(監務)가 파견되었고, 고려 후기에는 한주(韓州)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한산현이 한주로 승격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데, 한산 지역 출신 명현 이곡(李穀)과 이색(李穡) 부자와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비인현은 통일 신라의 서림군에 속하여 있다가 1018년(현종 9) 서림군과 함께 가림현의 속현이 되었으며, 고려 후기에는 감무가 파견되었다. 이러한 군현 이외에도 고려 시대 서천에는 특수 행정 구역으로 향, 소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서천군조에 의하면 군의 동쪽 21리[8.25㎞]에 문조향(文照鄕), 군 북쪽 14리[5.5㎞]에 임술소(林述所), 군 남쪽 24리[9.43㎞]에 웅진명소(熊津溟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술소는 장항촌(獐項村)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로 보아 서해안의 포구로 어물과 소금을 생산하였던 곳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웅진명소는 조선 시대에는 용당진사(龍堂津祠)라고 하여 금강을 드나드는 선박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한 곳이다.
[서천의 인물]
고려 건국 시기는 중앙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이 약하였던 때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지배층이 등장하였다. 서천 지역도 마찬가지였는데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지만 서림 이씨 시조 이익존(李益存)이 고려 초의 공신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한다. 이익존의 20세손 이언충은 1292년(충렬왕 18) 20세의 나이로 국자감시에 합격한 인물이다. 1294년 과거 급제 이후 1321년 밀직부사를 거쳐 충숙왕 대에는 벽상삼한삼중대광도첨의좌우정승이 되었으며 서주백(西州伯)에 책봉되었다. 한편, 한산 이씨의 시조 이윤경은 호장을 역임하였으며, 이윤경의 묘역에 있는 지현리삼층석탑에는 고려 전기의 호족 세력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모습이 전하고 있다. 이윤경의 후손으로는 이지명(李知命)과 이당모(李唐髦) 부자가 있으며, 또한 이곡과 이색 부자는 고려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지명은 1144년(인종 22) 과거에 급제하고 황주서기·충주판관을 거치며 청렴하고 정직하게 민심을 살폈으며, 그로 인하여 무신정변이 발생하여 문신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아들 이당모는 1188년(명종 18)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국자사업(國子司業)을 지냈다. 이곡과 이색 두 사람은 모두 원나라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할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곡이 남긴 『가정집』과 이색의 『목은집』에는 고향인 한산의 풍경을 노래하는 시구도 여럿 전한다.
[왜구 침입과 진포대첩]
금강 하구에 해당하는 서천 지역은 서남해 연안과 중국을 잇는 해상 교통의 거점이었고, 고려 정부가 조세를 운송하는 주요 길목이었다. 고려 전기에는 금강 하구의 진포(鎭浦)를 ‘조종포(朝宗浦)’라고 하였는데 고려 후기에 이르러 다시 ‘진포’로 바뀌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인하여 서천에는 왜구 침입이 매우 잦았다. 고려 시대 왜구 침입이 본격화된 것은 1350년(충정왕 2)부터였다. 왜구는 조운선을 공격하고 서해안의 여러 고을을 침입하여 주민들을 잡아가고 각종 물품을 약탈하였다. 그런 가운데 1380년 왜구가 500척의 배로 진포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침입하면서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해도원수(海道元帥) 심덕부(沈德符)로 하여금 전선 100척에 화포를 내세워 반격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왜선 500척은 모두 불에 타고 침몰하였다. 이때 최무선이 염초 제조에 성공을 거두어 화약을 만들어 화포를 쓸 수 있었다. 또한 진포대첩의 공신으로 나세(羅世)를 빼놓을 수 없다. 나세는 원나라로부터 고려로 귀화한 나부(羅富)의 5세손으로 홍건적의 난, 목호의 난을 진압할 때에도 공을 세웠다. 나세와 관련하여서는 장항에 인접한 마서면에 나세의 제단, 나주 나씨의 집성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