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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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 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범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남도 서천군의 역사.
[군현제도의 개편과 서천]
조선 시대 서천 지역은 서천군, 한산군, 비인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진관 체제에 따라서 한산군은 공주목에, 서천군과 비인현은 홍주목의 관할 아래 편제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한산군은 지금 서천군의 한산면과 한산면 일대, 서천군은 서천읍과 서천읍 일대, 비인현은 비인면과 비인면 일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 초에 한산군에는 342호, 1,607명, 서천군에는 421호, 1,876명, 비인현에는 166호, 651명으로 서천 지역은 모두 929호, 4,134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서천 지역에 파견된 관리로는 한산군과 서천군에는 종4품의 군수 1인과 종9품의 훈도 1인이, 비인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 1인이 있었다. 3개 군현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에는 향교와 사직단, 성황사, 여단이 있었으며 특별하게 서천군에는 금강에 제사를 지내는 용당진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 전기 서천 지역의 역원은 모두 이인도에 속하였으며 비인현에는 청화역, 서천군에는 두곡역, 한산군에는 신곡역이 자리하였다. 원(院)은 역보다는 많아서 한산군에는 4곳, 서천군에는 2곳, 비인현에서 3곳이 있었다. 봉수는 15세기와 16세기가 달랐다. 15세기에는 한산군에 도리산과 남산, 서천군에 장암과 다사산, 비인에 칠지산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는 한산군 지역의 봉수가 모두 폐지되고 서천군에는 운은산, 비인현에는 칠지산만 남게 되었다.
[군사제도의 변화와 서천]
조선 전기 서천 지역의 군사제도를 보면 한산군은 공주진영에, 서천과 비인은 홍주진영에 속하여 있었다. 진관체제 아래에서 서천군수와 한산군수는 동첨절제사를, 비인현감은 절제도위를 각각 겸직하였다. 소속된 군인의 수를 보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단계에서는 한산군 217명, 서천군 233명, 비인현 89명이었다. 군인의 수는 『여지도서(輿地圖書)』 단계에 이르러 한산군 309명, 서천군 428명, 비인현 118명으로 늘어났으나 그중에서 상당수는 속오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영장제가 실시되면서 진관체제와는 조금 다른 군사 편제를 보인다. 비인현, 서천군, 한산군은 모두 홍주의 전영(前營)에 속하여 있었다. 서천 지역이 모두 같은 군사 단위로 묶이게 된 것이다. 서천 지역에는 수군도 존재하였다. 서천 지역에는 마량진과 서천포에 각각 수군첨사와 수군만호가 배치되어 있었다. 마량진에는 병선이 모두 21척이 있었고 서천포에는 모두 11척이 있었다.
[조세제도의 변화와 서천]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서천 지역에도 인구가 늘어났다. 『세종실록지리지』 단계에서는 서천 지역의 인구가 4,134명에 불과하였으나 18세기 중반의 『여지도서』에는 3만 3709명, 18세기 후반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3만 624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조선 전기에는 한산군과 서천군의 인구 비중이 비인현에 비하여 2~3배 많았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한산군, 서천군, 비인현의 인구 비중이 거의 비슷하게 되어 인구 분포가 평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토지 경작지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 단계에서는 서천군이 가장 많아서 3,774결, 한산군이 3,060결, 비인현이 1,662결이었으나, 『여지도서』에서는 서천군이 5,289결, 한산군이 4,147결, 비인현이 1,931결이어서 비인현이 상대적으로 경작 가능한 토지가 적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천 지역의 조세 상납은 군현마다 조금 달랐다. 한산군은 1월에 거두기 시작하여 2월 20일에 모두 선박에 싣고 와포에서 출발하여 3월 10일에 광흥창에 상납하였다. 서천군은 1월에 거두기 시작하여 3월까지 선박에 싣고 해창포에서 출발하여 7일 뒤에 경창의 별창에 상납하였다. 비인현의 경우 1월에 거두어 2월 15일까지 모두 선박에 싣고 장진포에서 출발하여 7일 뒤에 광흥창에 상납하도록 하였다. 한산군의 경우 전세는 18세기 중반 쌀 619석을 상납하였다. 서천군의 경우 전세는 쌀 619석, 대동세의 경우 저치미는 866석을 창고에 저장하고 1,500석을 서울에 상납하였다. 비인현의 경우 전세는 273석을 상납하고 대동세의 경우 저치미 77석을 제외하고 170석을 서울에 상납하였다. 비인현의 경작 토지가 적기 때문에 서천군과 한산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상납하는 조세미가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