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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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堣 |
영어공식명칭 | Yi Woo |
이칭/별칭 | 명중(明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정의]
조선 전기 서천 출신의 문신.
[가계]
이우(李堣)[1432~1467]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명중(明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판문하부사 이색(李穡)이고, 할아버지는 중추원부사 이종선(李種善)이다. 아버지는 영중추원사 이계전(李季甸)이고, 어머니는 지봉산군사 진호(秦浩)의 딸 풍기 진씨(豐基 秦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서진생(徐晉生)의 딸 이천 서씨(利川 徐氏), 두 번째 부인은 권숭지(權崇智)의 딸 안동 권씨(安東 權氏)이고, 아들은 이장윤(李長潤)이다. 동생은 이파(李坡)·이봉(李封)이다.
[활동 사항]
이우는 1432년(세종 14) 한산[현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 1) 대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55년(세조 1)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워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1457년 성균관사예로 재임 중 중시 문과에 합격하였고, 1459년 판내자시사로서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론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우는 1462년 4월 조정에서 관찰사와 수령의 작폐를 조사하기 위하여 전국에 감찰관을 파견할 때 황해도로 파견되었다. 이때의 조사 내용은 수령칠사(守令七事)[농상을 진흥시키고, 호구를 늘리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정을 잘 다스리고, 부역을 고르게 하고, 사송(詞訟)을 잘 처리하고, 간활(姦猾)을 없애는 일곱 가지 수령의 업무]의 거행 여부와 백성에 대한 포악한 행위 등이었다.
이우는 이후 황해도관찰사와 사간원사간대부,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465년에 건주위(建州衛) 여진과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었을 때는 중국에 표류한 제주인 김형두(金逈豆) 등 14명을 데려오기도 하였다. 이우는 명나라 사행에서 돌아온 뒤 1467년에 사망하였다.
[묘소]
이우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광주읍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우는 사망한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