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의 저산팔읍 길쌈놀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018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 -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여하여 민속놀이로 재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1년 7월 9일 -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3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 충청남도 무형유산으로 변경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에서 전하는 모시짜기를 형상화하여 연행하는 민속놀이.

[개설]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는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서천군 한산면의 특산물인 한산모시를 길쌈하여 짜는 모습을 민속놀이의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다. 저산팔읍(苧産八邑)은 한자 그대로 ‘모시의 생산지인 여덟 고을’을 뜻하는데, 충청남도의 한산, 서천, 비인, 남포, 홍산, 정산, 부여, 임천 지역을 칭하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천·한산·임천은 모시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였으니,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는 특히 서천·한산을 놀이의 중심으로 내세워 재구성한 놀이이다.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 는 1991년 7월 9일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남도 무형유산으로 바뀌었다.

[모시짜기와 여성]

조선 후기에는 모시의 생산과 유통이 활성화되었는데, 이는 17~18세기 금강의 수운을 이용한 장시의 발달과 저산팔읍을 기반으로 하는 보부상의 역할이 큰 영향을 끼쳤다. 저산팔읍에서 생산된 모시는 실제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지역 장시의 망을 통하여 전국 각지로 팔려 나갔다. 이 중에서 특히 한산모시는 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급 모시로 명성이 드높았으며, 현재도 전통 옷감으로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어 한산모시짜기가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받을 정도이다.

모시는 올의 굵기에 따라 가장 가는 세모시[상저], 중간 정도의 중저, 가장 굵은 막저로 구분하는데, 한산은 특히 세모시로 유명하였다. 세모시는 가장 가늘고 고운 모시인데, 모시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질이 뛰어났다. 그런데 세모시는 모시를 째고 짜는 일에 고도의 제직 기술이 필요하다. 애당초 태모시를 가늘게 찢어야 섬세한 올이 나오기 때문이다. 많은 공력이 들어가야 할뿐더러 시간도 곱절이나 더 걸린다. 예컨대 올이 거친 막저나 중저를 한 필 짜려면 2~3일이면 족하지만,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세모시는 4~5일이 걸렸다. 이러한 특별함으로 말미암아 한산의 세모시는 이웃 마을의 어떤 모시보다 빼어난 품질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한산모시를 짜는 길쌈 노동은 지난날에는 부녀자의 몫으로 오롯이 남아 있었으니, 한산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들의 숙명과도 같았다. 그래서 10여 세에 이르면 너 나 할 것 없이 자연스레 모시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여자로 태어난 이상 모시짜기는 혼인하기 전에 반드시 익혀야 할 기술이었다. 모시를 잘 짜는 처녀는 단연 최고의 며느릿감으로 꼽히지만, 그렇지 못하면 혼사도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고, 또 며느리의 솜씨가 성글면 베틀에 앉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구박과 시집살이의 설움을 감내하여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마다 솜씨의 차이가 도드라질 정도로 모시짜기는 섬세한 손놀림이 중요하다. 첫술에 배부르기가 어려워 반복적인 노동을 통하여 숙련되는 직조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대개 초보 시절에는 째기와 삼기를 주로 한다. 이른바 모시째기는 길쌈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작업이다. 태모시를 가늘게 찢어야 고운 세모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마른 태모시를 한 시간 남짓 물에 담가 두었다가 구정물을 뺀 후 한 올씩 입에 넣어 혀와 치아의 감을 이용하여 쪼갠다. 이빨로 긴 모시의 줄기를 가르다 보면 앞쪽의 치아가 닳아 없어지고, 입술과 손바닥이 터져 피가 나기 일쑤였다. 입으로 째서 삼아 둔 모시는 꾸리[둥글게 감은 실타래]로 감고, 실을 길게 잇는 모시날기, 풀을 먹여 질기게 하는 모시매기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베틀에 앉아 모시를 짰다.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 중에 부르는 「베틀노래」의 사설 일부는 이러한 노동 과정의 고달픔을 묘사하고 있으니, 지난날 길쌈을 하느라 짬이 없던 여인들의 한숨과 시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살을 째고 피를 매어 오뉴월 짧은 밤을/ 왈캉달캉 베를 짜서 논을 살까 밭을 살까/ 베를 걸어 한 필 짜면 닭이 울고 날이 샌다/ 피를 매어 짠 모신데 어찌 이리 곱고 희냐/ 베틀에서 허리 펴니 이내 몸은 백발이라.”

이처럼 모시짜기는 오뉴월 짧은 밤을 지새우며 살을 째고 피를 매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고, 눈이 시리고 등이 휘는, 참으로 고된 작업이다. 세월이 흘러 한산 지역 부녀자들이 베틀에서 허리를 펼 즈음이 되면 몸은 백발이 되고 저승길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길쌈놀이의 근간인 모시 공동체]

저산팔읍의 모시 생산이 활성화된 배경으로 지리적 입지를 빼놓을 수 없다. 해안과 금강이 만나는 서천은 인접 지역의 태모시 반입이 자유로웠다. 이는 모시풀을 재배하지 않는 농가에서도 얼마든지 모시를 생산할 여건을 제공하였다. 이처럼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이 모시에 매달리다 보니 상부상조하는 공동 작업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길쌈을 위하여 운영된 여성들의 ‘모시방’과 ‘모시두레’는 그 상징으로서 모시짜기의 능률을 한껏 높여 주었다.

모시방은 여럿이 공동으로 모시를 짜는 곳이다. 모시를 많이 생산하는 집은 으레 한 칸 또는 두 칸의 모시방을 갖추고 있는데, 한 마을에서 나이가 비슷한 10~15명이 모여 함께 모시를 짠다. 함께 작업하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무료함을 달래기도 한다. 또 서로 많이 짜려는 경쟁 심리도 작동하므로 작업 능률이 배가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지은 『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에는 다음과 같이 길쌈놀이가 소개되어 있다. “여러 집의 처녀들이 모여 길쌈을 한다. 자기 집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차례로 한 집씩 힘을 모아서 한다. 일이 전부 끝난 후에는 식혜나 떡 등을 내어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를 베푼다. 유래는 신라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모시두레 는 모시짜기의 근간인 모시 굿을 빨리 만들기 위한 공동체의 지혜이다. 모시 굿은 삼은 모시를 광주리에 담아 둥글게 사려 놓은 것을 말한다. 모시 한 굿은 하루 종일 태모시를 째고 이튿날 삼으면 완성된다. 이 밖에 한가위를 앞두고 대목에 필요한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두레를 조직하기도 한다. 보통 4명 정도가 함께하는데, 이를 위하여 장에 나아가 태모시 한 근을 산다. 이것을 나누어서 각자 째고 삼아서 ‘한 광주리’를 마련한다. 모시 한 필을 짜려면 ‘네 광주리’가 필요하므로 네 명이 동일하게 몫을 나누어 작업한다. 일을 빨리 끝내야 추석장을 볼 수 있으므로 밤이 늦도록 쉬지 않고 일한다. 이렇게 3~4일이면 모시 한 필을 짤 모시 굿을 완성할 수 있다. 10일 정도 공동 작업을 하면 모시 한 필이 완성된다. 모시를 팔아 네 몫으로 돈을 나누어 명절을 준비한다.

품앗이의 관행도 포착된다. 특히 모시삼기와 모시매기에 품앗이가 조직되었다. 다른 모시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삼기와 매기는 일손이 많으면 한결 일이 수월하여진다. 그래서 친분이 있는 4~5명이 품앗이를 짜서 한 집씩 번갈아 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였다. 요컨대 여느 지역보다 모시 생산량이 많은 한산 지역은 자연스레 모시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토양이 갖추어져 있었다. 일과 놀이가 하나로 기능하였던 지난날의 생업 환경에서, 모시를 매개로 한 공동체는 부녀자들이 주체가 되는 서천의 저산팔읍 길쌈놀이가 새롭게 창출되는 원동력으로 작동하였다.

[민속놀이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다]

1세기 초 신라 유리왕이 두 왕녀로 하여금 부내의 여자들을 나누어 베를 짜게 하고, 추석날에 결과를 심사하여 진 편이 이 긴 편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으로 미루어, 일찍부터 모시 길쌈이 전승되었으며 나라에서도 이를 장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천의 저산팔읍 길쌈놀이는 한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모시짜기를 민속놀이의 형태로 연출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산의 부녀자들은 모시짜기가 생활의 일부였기에 따로 연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길쌈놀이에 무척 숙달된 상태였다. 이렇듯 지역민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모시 생산을 역동적인 놀이로 재구성함으로써 20세기 후반 새로운 민속 예술의 전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 는 모두 아홉 마당으로 구성되며 민요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 내용은 태모시를 손질하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부터 베틀 앉아 모시를 짜는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공정이 놀이 형태로 갈무리되어 있다. 각각의 절차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 번째 마당은 입장이다. 풍물패가 흥겹게 길군악을 울리며 놀이마당에 들어서는 것으로 서천저산팔읍길쌈놀이가 시작된다.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저산팔읍의 깃발과 각 고을의 깃발을 앞세우고 베틀, 쩐지[여러 가닥의 실을 틈에 끼워 걸어 놓고 한 올씩 이을 때 쓰는 기구], 태모시 등 각종 소품을 들고 입장한다. “임천이요! 한산이요! 남포요! 보령이요! 서천이요! 홍산이요! 비인이요! 정산이요!”라고 외치며 놀이마당에 들어서면 각 고을의 깃대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선다. 모시를 짜는 저산팔읍 주민들은 10~13명이 한 무리가 되어 본격적인 모시짜기 준비에 들어간다.

두 번째 마당은 모시베끼기이다. 길쌈의 첫 과정인 태모시 손질을 하는 과정이다. 태모시의 껍질을 벗기는 장면을 재현한다. 푸른빛을 띠는 모시 껍질의 속과 안을 분리하면 속의 것이 모시의 원재료인 태모시이다. 태모시를 베끼는 동안 한편에서는 흥겹게 노래를 부른다.

세 번째 마당은 모시삼기이다. 껍질을 벗긴 태모시를 입으로 가늘게 찢는 과정이다. 찢기에 쉽게 태모시를 갈라 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한 올씩 입에 넣어 혀와 치아의 감을 이용하여 일일이 짼다. 이때 보유자가 선창을 하면 8개의 팀원들은 일제히 「모시삼기노래」를 따라 부른다.

네 번째 마당은 모시꾸리감기이다. 모시삼기로 가늘게 찢은 올을 이어서 꾸리로 감는 작업이다. 이를 위하여 삼은 모시를 쩐지에 올려놓고 작업한다. 꾸리로 감을 때는 노래가 수반된다. 모시의 머리 부분에서 한 올을 빼서 왼손에 들고, 다시 한 올을 빼내어 잇는다. 머리부터 빼야 실이 엉키지 않는다.

다섯 번째 마당은 모시날기이다. 모시를 짜려면 모시 꾸리의 모시 올을 길게 이어야 한다. 10개의 구멍이 뚫린 조슬대[날실을 끼우는 나무틀]에 모시 올을 통과시켜 일렬로 놓아 둔 날틀에 실을 한 올씩 걸어 잇는다. 모시 굿에 미리 쌀겨를 뿌려 모시 올이 조슬대를 통과할 때 엉키지 않게 한다. 놀이의 과정에서는 돌곁[실을 내리는 도구. 지역에 따라 돌굿, 돌것 등으로 부른다.]에 모시를 얹고 한 올 한 올 푸는 작업을 하고, 이어 나른 모시를 돌곁에서 내리는 것까지를 행한다. 작업을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여섯 번째 마당은 모시매기이다. 날아 둔 모시를 질기게 하고자 길게 매고, 모시 솔로 콩풀을 발라 주는 작업이다. 이때 모시날기를 할 때 부르는 노래를 반복하여 부른다.

일곱 번째 마당은 모시짜기이다. 두루마리를 베틀에 얹고 앉을개[밑싣개]에 앉아 모시를 짠다. 저산팔읍 각 고을별로 베틀이 마련되어 있어 팀별로 모시를 짜고, 나머지 사람들은 베틀 주변을 돌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때 「베틀노래」를 부른다.

여덟 번째 마당은 모시감별이다. 모시를 짜고 나서 감별사가 모시 검사를 한다. 감별사는 저산팔읍의 모시 베에 대하여 “□□ 모시는 척이 짧고 □□ 모시는 폭이 좁으며, 또 탁이 나고 변이 나쁘고 성글다.”라는 등 고을별로 품평을 한다. 맨 마지막에 “오늘의 장원은 보름세로 짠 한산 모시입니다.”라고 외친다.

마지막 아홉 번째 마당은 한산모시예찬이다. 저산팔읍 모시 경연에서 한산의 우승이 발표되면 8개 군은 일제히 깃발을 들고 놀이마당 중앙에 모인다. 가마를 놓고 장원을 한 한산의 대표를 태우고, 가마를 중심으로 8개 군이 한데 어우러져 빙글빙글 돌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때 「저산팔읍 모시예찬가」를 부른다. 예찬가를 끝으로 저산팔읍 길쌈놀이의 대미를 장식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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