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의 여류 시인, 임벽당 김씨와 부용당 신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010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호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여류 시인인 임벽당 김씨부용당 신씨의 삶과 작품 세계.

[개설]

조선 시대 3대 여류 시인으로 불리는 김임벽당(金林碧堂)[1492~1549], 신부용당(申芙蓉堂)[1732~1791]은 충청남도 서천군이 낳은 문인들이다. 임벽당 김씨는 비인현 도화동[현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에서 거주한 여성 문인이며, 『임벽당집(林碧堂集)』을 저술하였다. 부용당 신씨는 한산군 숭문동[현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 출신이며, 세 명의 오빠들과 나란히 시재(詩才)를 겨룬 여성 문인이다. 『부용시선(芙蓉詩選)』을 저술하였다.

[생애 및 활동]

1. 임벽당 김씨

임벽당 김씨는 부여현 중정리[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에서 아버지 의성 김씨(義城 金氏) 김수천(金壽千)과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 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계 유씨(杞溪 兪氏) 유여주(兪汝舟)[1477~1545]와 혼인하여 비인현 도화동에 정착하였다. 유여주는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형제들과 비인현으로 낙향하였다. 임벽당 김씨와 유여주는 집 근처에 배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심어 놓고 꽃이 피면 완상하며 살았는데, 그로 인하여 마을 이름을 ‘도화동(桃花洞)’이라고도 하고 이화동(梨花洞)이라고도 하였다. 또 집 근처에 연못을 조성하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은 뒤 선취정(仙醉亭)과 임벽당(林壁堂)을 짓기도 하였다. 부귀공명에 대한 욕망을 버린 채 소탈하게 살았다.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이 두 번이나 찾아와 시를 남기고 갔다고 전한다.

임벽당 김씨는 조선 전기의 3대 여성 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시대의 유명한 문학 평론가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조선 전기의 3대 여성 시인에 정씨, 성씨, 김씨가 있다고 하면서 각각 시를 소개하였다. 『패관잡기』에서 말한 김씨가 바로 임벽당 김씨이다. 어숙권의 언급 이후에도 임벽당 김씨의 한시는 우리나라 역대 한시 평론사에서 자주 회자되었다. 임벽당 김씨는 시(詩)·문(文)·자수(刺繡)에 뛰어났으며 『임벽당칠수고(任碧堂七首稿)』 등에 작품을 남겼다. 글씨도 잘 썼다고 한다. 시집으로 『임벽당집』이 규장각과 일본인 다카하시 도루[高橋亨][1878~1967]에게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임벽당 김씨의 시는 명나라의 시선집인 『열조시집(列朝詩集)』과 허균(許筠)[1569~1618]의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7수를 볼 수 있으며, 『난설헌집(蘭雪軒集)』에도 「증별(贈別)」과 「빈녀음(貧女吟)」을 제외한 나머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시는 주로 가난과 이별에 따른 여인의 한을 그리고 있다. 특히 「증별」에는 오랫동안 객지에 나가 있는 임을 그리는 애절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빈녀음」에서는 표면에는 가난한 집 여인의 한탄을 말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자신의 가난함을 편히 여기는 듯한 의식이 깔려 있다. 사망한 해는 분명하지 않으나 날짜는 2월 21일로 알려져 있으며, 『기계유씨족보(杞溪兪氏族譜)』에 의하면 묘는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에 있다. 후손들이 임벽당 김씨가 생전에 살던 동네에 임벽당 김씨의 시를 새긴 시비 공원을 조성하여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현재 비인면 남당리에는 집터로 추정되는 장소와 묘소, 임벽당 김씨와 유여주가 심었다고 전하는 500여 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2. 부용당 신씨

부용당 신씨의 별호는 산효각(山曉閣)이며, 남편은 윤운(尹惲)[1730~1773]이다. 부용당 신씨는 한산군 숭문동에서 세 명의 오빠인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1712~1775], 기록(騎鹿) 신광연(申光演)[1715~1778],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1729~1796]와 함께 공부하며 문학적 천재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부용당 신씨는 당대 명문장가인 오빠들의 문풍에 힘입어 많은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다. 부용당 신씨의 남편 윤운은 우리나라 최고의 가사 문학가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후손이며 공제(恭齊)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손자이다. 부용당 신씨의 친정 집안은 아버지 신호(申澔)[1687~1767] 대에 이르러 가세가 점점 기울어 서울에서 낙향하여 한산군에 정착하였다. 신호는 벼슬과는 거리가 먼 향리 궁촌에서의 삶을 살았으나, 자식들의 문학적 재주와 기개는 대단하였다.

부용당 신씨는 세 오빠와 문학 환경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문학 수업을 받았다. 혼인한 이후에도 시댁이 있는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 살지 않고, 줄곧 친정이 있는 서천 지역에 거주하였고, 남편 윤운이 두 지역을 오가며 살았다. 남편이 사망하였을 당시에는 외가가 있는 보령현 신성리[현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살았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의 이름은 윤규영(尹奎永)과 윤규응(尹奎應)[윤지눌(尹持訥), 1762~?]이다.

한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윤두서의 외증손으로서, 부용당 신씨에게는 시가 쪽 5촌 당질이 된다. 부용당 신씨의 둘째 아들 윤지눌은 정약용과 6촌 형제간이지만 벗처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지냈다. 윤지눌의 묘지명을 정약용이 썼는데, 윤지눌 형제가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웠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윤지눌 군은 일찍 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 신 부인이 마치 이소(二蘇)[중국 북송 시대의 문장가인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형제를 말함]의 누이처럼 글을 잘하였다. 이 때문에 가르침을 받은 바가 많았다.”

부용당 신씨는 “나의 소원은 금강산을 보는 것[願我見金剛]”이라고 말할 정도로 금강산 여행을 꿈꾼 여성이었다. 친정 조카 신석상(申奭相)[1737~1816]이 부용당 신씨를 기리는 제문에는 부용당 신씨가 손수 엮은 『부용당집』이 여러 권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전하여지지 않고, 뒤에 엮어진 『부용시선』이 세 오빠의 문집들과 함께 『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에 실려 전하여 온다. 다양한 문학 작품을 수록한 문집 『부용시선』은 시 23편, 서 2편, 제문 2편, 잡저 4편, 부록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용당 신씨는 60세의 나이로 타계하여 남편이 묻혀 있는 해남의 화산(花山)에 합장되었다.

[대표 작품]

1. 임벽당 김씨『임벽당칠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문집이다. 임벽당 김씨의 한시는 임벽당 김씨의 7세손 유세기(兪世基)[1653~1711]가 편집하여 『임벽당칠수고』라는 시집으로 묶였다. 시집의 편찬 동기는 중국인 전겸익(錢謙益)[1582~1664]이 엮은 『열조시집』에 임벽당 김씨의 한시 작품 3수인 「증별」, 「빈녀음」, 「고객사(賈客詞)」가 실려 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었다. 임벽당 김씨는 시·글씨·자수의 삼절(三絕)로 이름을 떨쳤는데, 시명(詩名)을 중국까지 드날렸던 것이다. 임벽당 김씨는 자신의 호를 주제로 하여 「제임벽당(題林碧堂)」이라는 시 2수를 짓고, 자필로 써서 수를 놓아 베갯모를 장식하였다. 임벽당 김씨가 수를 놓은 베개가 집안에 200여 년간 전하여 내려오기도 하였다. 유세기는 베개에 수놓은 시 2수, 허균이 엮은 『국조시산』에 수록된 시 2수, 『열조시집』에 수록된 시 3수를 모아 당대에 유명한 문인 남구만(南九萬)[1629~1711]·조지겸(趙持謙)[1639~1685]·윤증(尹拯)[1629~1714]·조인수(趙仁壽)[?~1692]·한태동(韓泰東)[1646~1687]·남용익(南龍翼)[1628~1692] 등의 서문과 발문을 첨부하여 시집을 편찬하였다. 이로 인하여 『임벽당칠수고』는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 최초 여성 문인의 시집이 되었다.

임벽당 김씨가 베갯모에 수를 놓았다는 「제임벽당」에 대하여 남구만은 “암송하면 성률이 화평하고, 음미하면 흥취가 그윽하고 한가로워 『시경(詩經)』「이남(二南)」의 유풍을 계승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세속을 벗어난 아취와 자득의 즐거움, 가난하나 검약하여 화려함을 그리워하지 않았다.”라고 하며 도연명(陶淵明)[365~427]과 임포(林逋)[967~1028]의 작품들과 견줄 만하다고 극찬하였다. 「종손과 작별하며[贈別從孫]」는 어숙권의 『패관잡기』에 시와 평이 실려 있다. 어숙권이 중종(中宗)·명종(明宗) 대에 활동한 것을 고려한다면, 임벽당 김씨의 시는 생존 당대에 이미 세간에 회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에서는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속세에 연연하지 않으며 담담한 모습으로 삶을 관조하듯 살아가는 임벽당 김씨의 모습이 아련하게 그려져 있다.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 안서(岸曙) 김억(金億)[1896~?]은 「종손과 작별하며」를 3장 형식의 시조로도 변용하여 “두메니 세상일야 알 길이 없는 데다, 살님이 가난하야 술조차 없고 보니, 잘 손도 아닌 밤중에 길차비만 합니다.”라고 읊었다.

2. 부용당 신씨『부용시선』

부용당 신씨의 시문은 친정 형제들의 문집을 함께 엮은 『숭문연방집』에 ‘부용시선’이라는 표제로 나란히 실려 있는데, 안에는 ‘산효각부용시선(山曉閣芙蓉詩選)’이라고 씌어 있다. 「춘사(春詞)」와 「추일(秋日)」에서 봄과 가을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는데, 단순한 시상 속에 화평하고 즐거운 계절의 특성을 부각시키는 기법이 뛰어나다. 「춘사」에서는 봄을 맞이하여 초목이 생기를 더하는 가운데 부모님과 형제 모두가 안락하게 지내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온 백성이 편안한 태평성대가 영원하길 기원하며, 부모님의 만세 평안을 축원하는 노래이다. 「추일」에서는 높은 하늘과 먼 들길, 한가로이 배가 떠 있는 푸른 강의 정경을 통하여 가을날의 맑고 고즈넉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전가락(田家樂)」은 전원에 사는 일상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계집종은 아침에 시장에 다녀오고 남자 종은 산에서 땔나무를 지고 오는 가운데 자신도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어 볼까 하는 평안한 전원의 생활을 그려내고 있다.

부용당 신씨의 시는 일상생활을 담담하고 진솔하게 읊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농촌 생활의 어려움을 담은 「걸미두릉태수부지행(乞米杜陵太守不至行)」도 있다. 양식을 구하러 간 뒤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하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심정을 읊은 시이다. 서글픈 마음으로 하인들이 돌아올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오늘도 속절없이 벌써 해가 저문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시 「몽유금강산(夢遊金剛山)」은 조선의 여성으로 태어나 현실에서 가 볼 수 없었던 금강산을 꿈속에서 찾아가 노닌다는 기개 넘치는 시인데, 5언 20구 100자로 표현하고 있다. 부용당 신씨의 호연한 기상, 시적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한 시로 평가받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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