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방어의 최전선, 서천·한산·비인 읍성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019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범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에 있는 조선 시대 읍성에 대한 이야기.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로 서천 지역]

서천 지역의 읍성은 금강과 관련이 매우 깊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 시대에는 강이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강을 이용하면 바다에서 강의 상류 지역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금강은 오랫동안 서해와 충청남도 및 전라북도 내륙 지역을 이어 주는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백제 시대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수도를 옮긴 것도 백제인들이 강의 중요성을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백제 멸망 이후에도 충청남도 지역의 백성들에게 금강은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비옥한 토지를 만들어 주고 편리한 운송을 가능하게 하였다. 금강 하구를 중심으로 조운 창고가 만들어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교통이 편리하다는 것은 외적의 침입이 매우 쉬운 지역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려 후기부터 서천, 보령, 홍산 등은 금강 하구로 침입한 왜구들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고려 후기에 등장한 왜구는 쓰시마와 규슈의 연안을 근거지로 고려와 중국을 오가면서 노략질을 하였다. 금강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물자 교환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지만 혼란한 시기에는 왜구가 침입하는 길목이 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 고려 후기 정부는 왜구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고려 후기 왜구가 본격적으로 침입하게 된 것은 충정왕 연간부터였다. 당시 왜구는 남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점차 서해안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1323년(충숙왕 10) 6월 왜구들이 군산도에 주둔하고 있다가 남쪽에서 개성으로 올라가던 조운선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금강 하구가 조운선이 지나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하구 부근의 섬에 은거하면서 조운선의 곡물을 약탈하였던 것이다. 금강 하구에 왜구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1352년(공민왕 1)이었다. 금강 하구에 침입한 왜구들은 서천의 장암진에 정박하여 진을 쳤다. 장암진은 군사 기지였기 때문에 초기 대응을 못하고 빼앗겼던 것이다. 왜구들은 장암진을 근거지로 금강을 드나드는 선박을 약탈하였다. 당시 고려의 해안 방어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후 우왕 대가 되면 왜구의 침입이 거의 매년 나타났다.

공민왕 시기에 이르러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여지자 고려 정부에서는 조운을 금지하고 육로로 세곡 운동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해안가에 있던 조운 창고들을 모두 육지로 이전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왜구의 계속된 침략으로 해안가 마을은 점차 황폐화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해안의 고향을 떠나서 내지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왜구의 침입 지역이 이후 점차 내륙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금강 하구에 있는 서천, 한산, 비인 일대는 충청도 지역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금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자, 충청도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첫 관문이 바로 서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서천 지역 세 곳에 읍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전기 서천 지역의 왜구 출몰]

고려 후기부터 시작된 왜구의 출몰은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충청도 해안의 군현들은 대부분 왜구의 침입을 받았다. 고려 후기 충정왕 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왜구들은 공양왕 대까지 무려 470여 회나 침략하였다. 규모는 적게는 20척에서 많게는 100척 이상의 대규모 함대를 끌고 들어왔다. 특히 충청도 서해안의 경우에는 삼남 지역의 조운로 중간에 있어서 왜구의 주된 약탈 목표가 되었다. 서천 지역은 대표적인 약탈 지역이었다. 문헌 기록상으로 고려 후기부터 세종 초반까지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출몰한 왜구의 선박은 무려 600여 척에 이르렀다.

한산군 출신이었던 이색은 1351년(충정왕 3) 왜구 방비책으로 선군을 재편성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색은 물길에 밝은 도서 지역 사람들로 선군을 보강한다면 도서민의 활로를 찾고 왜구를 퇴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 왜구에 대한 방어를 주로 육지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 전투와 선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결과 왜구의 격투는 남해안 연안 지역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왜구 잔당의 일부는 세종 대까지 이어졌다.

1419년(세종 1) 비인현 도두음곶에 50여 척의 왜선이 침입하였다. 충청도관찰사 정진의 보고에 의하면 1419년 5월 7일 새벽 왜선 50여 척이 나타나서 비인현 도두음곶에 이르러 조선 병선을 불태웠는데 연기가 자욱하여 서로를 분별하지 못할 지경이라고 하였다. 왜구가 도두음곶에 들어왔지만 당시 만호 김성길이 술에 취하여 방비를 하지 못하였고, 적선 32척이 조선 병선 7척을 불사르고 죽은 병사도 많았다고 한다. 뒤늦게 김성길과 아들이 함께 싸웠으나 왜구를 막지는 못하였다. 왜구들이 본격적으로 육지에 상륙하자, 비인현감 송호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싸웠으나 군사가 적었으므로 물러나서 비인현의 성에 들어가 항거하였다. 왜구는 비인성을 두어 겹으로 에워싸고 공격하였으나 측면에서 지서천군사 김윤과 남포진병마사 오익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함께 싸우자 왜구는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고 한다. 당시 왜구에게 죽임을 당한 군사가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후 충청좌도의 도만호 김성길은 전라도관찰사가 왜적이 경내를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렸으나 사전에 방비하지 못한 죄목으로 결국 참형을 당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하여 서천 지역에 다수의 관방 시설 정비가 이루어졌다.

[서천 지역의 관방 시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한산군, 서천군, 비인현에 있는 조선 전기 관방 시설이 기록되어 있다. 한산군에는 서천 건지산성한산읍성이 있다. 읍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만 나오고 서천 건지산성은 두 기록 모두에서 확인된다. 서천 건지산성은 군 서쪽 1리[0.39㎞]에 있으며 3분의 2는 토성, 3분의 1은 석성으로 만들어졌다. 둘레는 5,377보 혹은 3,061척[927m]이었다. 안에는 샘이 세종 대에는 5곳, 중종 대에는 7곳 있다고 기록하였다. 세종 대에는 군창이 있었는데, 중종 대에는 없어졌다고 기록하였다. 서천 건지산성이 세종 대까지는 중요한 관방 시설이었으나 중종 대에는 그러한 역할이 읍성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한산읍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4,070척[1.2㎞]이고, 높이는 11척[3.3m]이며, 도랑 1개에 우물 4개가 있었다고 한다.

서천 지역과 관련하여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성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읍성과 읍성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읍성을 보면 석성이며 운은산 아래에 있다고 하였다. 둘레는 160보 4척[1.2m]이며 안에 우물이 1곳이 있고 군창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 고읍성은 석성이며 영취산 산마루에 있다고 하였다. 둘레는 1,545척[468m]이고 안에 우물은 1곳 있었다. 세종 대에 지대가 외지고 막혔다 하여 현재의 읍터로 옮긴 것인데 아래에 또 고읍터가 있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 읍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3,525척[1㎞]이고 높이는 1척[30㎝]이며 안에 우물이 5곳, 연못이 2곳 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비인현에는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모두 고읍성과 읍성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고읍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276보였다. 우물과 샘이 없었고 바다 어귀에 이르기까지 160보에 불과하였다. 1421년(세종 3) 청주, 옥천 등 14개 군에서 군정 200명을 뽑아 4번으로 나누어 번갈아 가며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읍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1,933척[585m]이었다. 1430년 청화역 동쪽에 성을 쌓았고 읍치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읍성은 둘이었다. 첫 번째 고읍성은 현 동쪽 26리[10㎞]에 있으며 토성으로 둘레는 537척[162m]이고 우물은 1개 있었다. 두 번째 고읍성은 현 서쪽 2리[785m]에 있으며 토성으로 둘레는 828척[250m]이고 우물이 하나 있는데 현재는 없어졌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읍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3,505척[1㎞], 높이는 12척[3.6m]이었다. 안에 우물은 3개 있었고 바다까지는 160보에 불과하였다. 1421년 여러 고을의 군정을 동원하여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비인현의 경우 『세종실록지리지』에 기재된 고읍성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읍성이 같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인현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만 기재된 도두음곶수가 있다. 현 서쪽 20리[7.85㎞]에 있으며 우도첨절제사가 군사를 나누어 지켰다고 한다. 앞서 1419년 만호 김성길이 왜적과 싸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서천 지역의 읍성]

서천 지역에는 읍치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한 읍성이 세 군데 조성되었다. 비인읍성, 서천읍성, 한산읍성이 있었다. 조선 전기 세 읍성은 서천 지역을 방어하는 최전선으로 기능을 하였다. 비인읍성은 현재 비인면 성내리에 있다. 성은 동북쪽에서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낮은 구릉 지대에 있다. 비인읍성은 낮은 구릉 지대 2개를 연결하면서 해안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해안 쪽에서 오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좋은 입지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둘레는 대략 1,500m이며 석축으로 쌓은 읍성이다. 읍성이 있는 곳은 조선 전기부터 비인현의 치소가 있었다. 동북쪽에 있는 밀집된 산악 지대로부터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구릉이 있는 산지에 해당한다. 주변 북쪽, 남쪽, 동쪽은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오직 서쪽만 해안과 접하여 있다. 서쪽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읍성임을 알 수 있다. 비인읍성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 『문종실록』에는 적대 5개소, 문 3개소로 하나는 옹성이 없으며 여장 423개, 우물 3개, 해자는 둘레가 2,152척[652m]이라고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서(興地圖書)』를 보면 객관, 아사, 현사, 향청, 훈련청, 작청과 같은 비인현의 치소 건물이 다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천읍성서천읍 군사리에 있다. 서천읍성군사리의 시가지 동쪽 야산 정상부와 경사면을 감싸고 있는 둘레 1,068m의 석축성이다. 가운데 계곡을 끼고 잇는 포곡식 형태의 산성에 가깝다. 읍성이 있는 곳 북쪽은 높이 127m의 오석산이 있다. 남쪽으로는 멀리 남산이 보인다. 동서 방향으로 병풍처럼 보호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판교천이 흘러서 서해안으로 들어간다. 동쪽은 길산천금강으로 유입된다. 서천읍성의 주변은 모두 넓은 충적지로 배후로 연결되는 구릉성 산지에 있어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관련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서천읍성의 축성은 아마도 세종 대로 확인된다. 이후 문종 대에 한번 다시 수축을 하였으며 성종 대에는 다시 확장을 하였다. 서천읍성이 방어 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준다. 성종 대에 확장된 서천읍성은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둘레는 3,525척[약 1㎞]이며 치성은 27곳이고 동남쪽에 두 개의 문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비인읍성과는 다르게 서천읍성의 내부는 경사진 공간이었기 때문에 서천읍성 남쪽에 서천군 관아 건물이 치우쳐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산읍성한산면 지현리에 있었다. 한산읍성한산면 소재지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건지산에서 동쪽으로 빧은 산줄기의 구릉 말단부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축성한 둘레 1,919m의 평지성이다. 동쪽으로 구릉이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금강 연안에서 올라오는 왜구를 향하는 방향으로 읍성이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관련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동국여지지』에 조선 중종 대에 축성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비인읍성서천읍성에 비하여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옹성이 5개, 곡성이 1개가 있었고 동문에는 요덕루, 서문에는 수강루, 북문에는 백승루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