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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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劉性烈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민영 |
출생 시기/일시 | 1860년 10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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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유성열 신장리 장터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6월 14일 - 유성열 「보안법」 위반으로 1년 형 확정 |
몰년 시기/일시 | 1934년 4월 25일![]() |
추모 시기/일시 | 1983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출생지 | 유성열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
활동지 | 신장리 장터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
묘소 | 유성열 묘소 - 충청남도 부여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유성열(劉性烈)[1860~1934]은 1860년 10월 19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자, 유성열은 송여직·송기면 형제, 이근호 등과 만세 시위 계획을 협의하고 3월 29일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 거사하기로 하였다. 태극기 200여 매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마치고 거사 당일 신장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주도 인물 가운데 송여직은 “우리 한국이 자주 독립하여 자유를 향유하고 장래의 안락을 도모한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여 군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유성열은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대에 앞장서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시위가 발생하자 순사 주재소 경찰들이 즉시 출동하였고, 유성열은 송여직, 송기면 등 다른 주모 인사들과 함께 현장에서 연행되었다. 뒤이어 이근호와 나상준이 시위를 주도하면서 연행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다 주재소로 끌려갔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더욱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고, 연행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시위 군중은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안으로 들어가 경찰을 구타하고 창문과 책상, 의자 등 시설과 집기류를 파괴하였다. 주재소는 파괴되었고, 그 와중에 유성열은 다른 연행 동지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에 다시 시위대에 합류하여 한산면을 거쳐 서천면 방면으로 행진하던 중 서천군수 권익채(權益采)의 권유에 따라 해산하였다.
1919년 6월 14일 유성열은 「보안법」 위반으로 고등법원에서 1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4년 4월 25일 사망하였다.
[묘소]
유성열의 묘소는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유성열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