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여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736
한자 宋汝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9년 10월 28일연표보기 - 송여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송여직 신장리 장터 만세시위 선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9일 - 송여직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47년 9월 29일연표보기 - 송여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송여직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송여직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송여직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지도보기
활동지 신장리 장터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송여직(宋汝直)[1889~1947]은 1889년 10월 28일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에서 태어났다. 동생은 송기면(宋箕勉)이다.

[활동 사항]

송여직은 기독교 신자로 평소 일제의 국권 침탈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자, 송여직은 동생 송기면과 함께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날인 3월 29일에 맞추어 시위를 결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유성렬·이근호 등과 협의하는 한편,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200여 매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신장리 장터 현장에서 행한 “우리 한국이 자주 독립하여 자유를 향유하고 장래의 안락을 도모한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는 요지의 연설은 군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송여직송기면 등 주도 인사들과 함께 시위대에 앞장서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시위가 발생하자 마산면 순사 주재소의 경찰들이 즉시 출동하였고, 송기면을 비롯하여 유성렬 등 주모자들이 현장에서 연행되었다. 그러자 송기면 등을 대신하여 이근호나상준이 시위를 주도하면서 연행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다 역시 주재소로 끌려가고 말았다. 일제 경찰의 처사에 격분한 군중은 더욱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고, 주재소로 몰려가 연행 인사들의 석방을 거세게 요구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안으로 들어가 경찰을 구타하고 창문과 책상, 의자 등 시설과 집기류를 파괴하였다. 결국 주재소는 파괴되었고, 송여직은 다른 연행 동지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였다. 탈출한 동지들과 더불어 다시 시위대를 이끌고 한산면을 거쳐 서천면 방향으로 행진하던 중 서천군수 권익채(權益采)의 권유에 따라 해산하였다.

1919년 5월 19일 송여직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26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1919년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하여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송여직은 1947년 9월 29일 사망하였다.

[묘소]

송여직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송여직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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