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734
한자 宋箕勉
이칭/별칭 송기선(宋奇善),송기선(宋箕善)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1월 6일연표보기 - 송기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송기면 신장리 장터 만세 시위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14일 - 송기면 「보안법」 위반으로 1년 10개월 형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9일 - 송기면 경성복심법원에서 1년 6개월로 감형
몰년 시기/일시 1950년 9월 25일연표보기 - 송기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송기면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송기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송기면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지도보기
활동지 신장리 장터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송기면(宋箕勉)[1896~1950]은 1896년 1월 6일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송기선(宋奇善), 송기선(宋箕善)이다. 형은 송여직(宋汝直)이다.

[활동 사항]

1919년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자, 기독교 신자로 평소 일제의 국권 침탈에 불만을 갖고 있던 송기면은 형 송여직과 함께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날인 3월 29일에 맞추어 시위 운동을 결행하기로 하였다. 유성렬·이근호·임학규 등과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논의하는 한편,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200여 매를 제작하였다. 3월 29일 신장리 장터에서 형 송여직의 “우리 한국이 자주 독립하여 자유를 향유하고 장래의 안락을 도모한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는 연설에 크게 고무되어 많은 군중이 만세 시위 대열에 참여하였다. 이에 송기면은 시위대에 앞장서서 신장리 일대를 행진하며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시위 해산을 위하여 마산면 주재소의 경찰들이 즉시 출동하였고, 송기면은 형 송여직을 비롯하여 유성렬 등의 주모자들과 함께 현장에서 연행되었다. 뒤이어 이근호나상준이 시위대를 이끌고 연행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역시 끌려가고 말았다. 일제 경찰의 처사에 격분한 시위대는 더욱 격렬하게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주재소로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거세게 요구하며,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들어가 경찰을 구타하고 창문과 책상, 의자 등 시설과 집기류를 파괴하였다. 결국 주재소는 파괴되었고, 그 와중에 송기면은 다른 연행 동지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였다. 사기가 오른 시위대를 이끌고 한산면을 거쳐 서천면 방향으로 행진하던 중 서천군수 권익채(權益采)의 권유에 따라 해산하였다.

송기면은 일경에 피체된 뒤 1919년 4월 1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년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여 1919년 5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년 6개월로 감형된 데 이어, 1919년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송기면은 1950년 9월 25일 사망하였다.

[묘소]

송기면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송기면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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