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7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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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根浩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구동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민영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12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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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이근호 신장리 장터 만세 시위 선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4일 - 이근호 「보안법」 위반으로 1년 3개월 형 선고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9일 - 이근호 경성복심법원에서 1년 형으로 감형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6월 14일 - 이근호 고등법원에서 형 확정 |
몰년 시기/일시 | 1968년 6월 7일![]() |
추모 시기/일시 | 1983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출생지 | 이근호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구동리![]() |
활동지 | 신장리 장터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
묘소 | 이근호 묘소 - 충청남도 청양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근호(李根浩)[1890~1968]는 1890년 12월 18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구동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이근호는 일찍이 일제의 국권 유린에 불만을 갖고 있던 중 1919년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자, 송여직, 송기면, 유성렬 등과 협의하여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 거사하기로 하였다. 태극기 200여 매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마치고 3월 29일 신장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켰으며, 송기면 등 주도 인사들과 함께 시위에 앞장서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시위가 일어나자 순사 주재소의 경찰들이 즉시 출동하여 송여직, 송기면, 유성렬 등 중심인물을 현장에서 연행하였다. 이에 이근호는 나상준 등과 함께 군중을 이끌고 연행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다가 역시 주재소에 연행되었다. 경찰의 이러한 처사에 격분한 군중은 더욱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고, 주재소로 몰려가 연행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돌을 던지며 안으로 들어가 경찰을 구타하고 창문과 책상, 의자 등 시설과 집기류를 파괴하였다. 그러한 결과 주재소는 파괴되었고, 그 와중에 이근호는 다른 연행 동지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였다. 탈출한 동지들과 다시 시위대에 합류하여 한산면을 거쳐 서천면 방면으로 행진하던 중 서천군수 권익채(權益采)의 권유에 따라 해산하였다.
이근호는 1919년 4월 1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년 3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고하였는데, 1919년 5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919년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68년 6월 7일 사망하였다.
[묘소]
이근호의 묘소는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근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