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434 |
---|---|
한자 | 近代敎育 |
영어공식명칭 | Modern Educ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민석 |
[정의]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이루어진 근대식 교육.
[서천 지역 근대교육의 여명]
1905년 비인군수로 부임한 강원로(姜元魯)는 근대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지역 유지들과 인창학교(仁昌學校)를 설립하였다. 인창학교는 교육 기능이 정지된 비인향교를 교사로 사용하였다. 교장은 강원로였고 교감은 조돈승, 사무원은 채규철, 윤효석 등이었다. 이후 1907년 서천군수로 부임한 강원로는 군민들의 후원과 지지를 바탕으로 1908년 서창학교(舒昌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서천군의 근대식 교육 기관으로는 인창학교와 서창학교 외에 한영학교, 기산학교, 진취학교, 기독진명학교, 한명학교, 일신학교, 계창학교, 일광학교, 한산영모학교, 한산학교 등이 확인된다. 한영학교는 독립운동가 김인전(金仁銓)이 아버지 김규배와 함께 1906년 세운 기독교 중등학교였다. 설립 당시 교사는 김인전 외 4명이었고 학생 수는 보통과 10명, 고등과 16명이었다.
한영학교 출신 인물들은 독립운동가인 송기면, 송여직, 임학규, 김인두 등이 있는데, 1919년 3월 28일 마산신장에서 열린 3·1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처럼 당시 서천 지역 근대 학교들은 교육 기관의 역할을 넘어 국채보상운동, 3·1운동 등을 이끄는 주체가 되기도 하는 등 민족 교육의 산실이었다.
[일제 강점기 서천의 교육]
일제는 국권 침탈 후 면당 1개 공립 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천군에는 1911년 한산면 지현리에 한산공립보통학교[현 한산초등학교], 1912년 서천읍 군사리에 서천공립보통학교[현 서천초등학교], 1913년 비인면 성내리에 비인공립보통학교[현 비인초등학교]가 개교하였는데, 각각 기산학교, 서창학교, 인창학교 등의 시설과 학생을 강탈하여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22년 2월 공포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1922년 시초면 초현리에 시초공립보통학교[현 시초초등학교], 1923년 화양면 봉명리에 화양공립보통학교[현 화양초등학교], 1924년 마서면 봉남리에 서남공립보통학교[현 서남초등학교], 1925년 마산면 마명리에 마산공립보통학교[현 마산초등학교], 1929년 마서면 송내리에 마동공립보통학교[현 마동초등학교], 1933년 기산면 화산리에 기산공립보통학교[현 기산초등학교], 1934년 한산면 연봉리에 연봉간이학교[연봉초등학교, 1998년 폐교], 1934년 서면 신합리에 신합간이학교[서면공립보통학교로 계승], 1935년 문산면 신농리에 문산공립보통학교[현 문산초등학교], 1935년 화양면 남성리에 남성간이학교[금성초등학교, 2007년 폐교], 1936년 서면공립보통학교[현 서면초등학교], 1936년 종천면 화산리에 종천공립보통학교[종천초등학교, 1998년 폐교], 1937년 장항읍 성주리에 장항성봉공립보통학교[현 장항초등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1938년 공포된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설립된 학교는 1940년 장항읍 화천리에서 개교한 장항공립농업전수학교[현 장항공업고등학교], 1942년 마서면 장선리에서 개교한 마동국민학교 장선분교[장선초등학교, 1999년 폐교], 1943년 장항읍 신창리에서 개교한 장항옥남국민학교[현 장항중앙초등학교], 1943년 비인면 성산리에서 개교한 비인국민학교 성산분교[1992년 폐교] 등이다. 당시 공립 학교의 공식 설립 주체는 일제였지만 실상 지역민들의 운동과 유지들의 후원에 의하여 세워진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 농민을 대상으로 한 야학과 강습소도 설립되었다. 1922년 서천군 서남면[현 서천군 마서면]에 사립 옥산학교가 설립되었고, 길산노동야학, 비인야학, 삼산야학, 산정야학, 서천야학, 신흥야학, 원길야학, 월산야학, 종천야학, 화양야학, 형평야학 등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민들과 함께하였다.
일제 강점기 보통학교와 야학 등 서천 지역 학교들의 역할은 단순히 교육에 그치지 않았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학교 내 민족 차별, 일본인 교장의 폭압적 학사 운영에 저항하며 민족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