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33
한자 日帝 强占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민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6년 - 한영학교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4년 -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이 서천군으로 통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7년 - 한영학교 폐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3년 - 서천수리조합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3년 - 서천형평분사 창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3년 - 조선소작인상조회 서천지회 결성

[정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의 충청남도 서천 지역의 역사.

[개설]

충청남도 서천 지역은 조선 시대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이었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 개편에 의하여 서천군으로 통합되었다. 비옥한 곡창 지대를 포함하여 일제 수탈의 거점이 되었지만, 3·1운동을 기점으로 다양한 부문의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행정 구역 개편]

1913년 일제는 식민 통치를 강화하고 행정 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지방 제도 개편을 단행하였다. 지방 제도 개편으로 1수부 13도 11부 317군 4,322면이 13도 12부 220군 2,521면으로 통폐합되었다. 당시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 전부와 오천군 하남면 개야도, 죽도, 연도가 통합되어 3개군 28개 면이 1개군 13개 면[서남면, 시초면, 남양면, 문산면, 마동면, 비인면, 종천면, 서면, 동면, 한산면, 화양면, 가산면, 마산면]으로 개편되었다. 통합된 군청 소재지는 기존 서천군청 소재지와 같은 곳이었고 군명은 3개 군 가운데 가장 큰 서천군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경제와 사회 변화]

일제 강점기 서천 지역 인구는 1913년 7만 1388명에서 1930년 9만 2198명으로 증가하였다. 특히 일본인 인구는 같은 기간 356명에서 949명으로 늘어나 충청남도 증가율인 37.9%를 훨씬 웃도는 74.4%의 증가율을 보였다. 1929년 서천군 내 한국인의 93.5%, 일본인은 38.5%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농업 현황을 보면 자작농 비율이 12.5%로 충청남도 평균 8.4%를 웃돌았으며, 소작농은 50.2%로 도내 평균인 57.1%보다 적었다. 소유 토지가 모두 소작지인 순수한 지주 비율도 0.1%로 도내 평균인 0.4%를 밑돌았다.

서천군은 충청남도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군이었으나 비옥한 평야 지대가 있어 농업 생산량은 도내 2위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서천을 수탈의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에 거점을 둔 일본인들은 적극적으로 서천에 침투하였고 1923년 지역 농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서천수리조합도 설립하였다. 1930년대 서천 지역 일본인 대지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 지점을 제외한 개인도 10명이나 되었다. 일본인들의 적극적인 서천 진출 속에서 충남선과 장항항이 개발되어 서천뿐만 아니라 충청남도, 경기도, 충청북도, 강원도 지역 물자가 효율적으로 일본으로 반출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독립운동]

일제 강점기 서천 지역 독립운동의 기점은 3·1운동이었다. 금당교회 창설자 유성렬, 완포교회 신자 송기면 등은 기독교 보급을 통하여 근대화를 추진하고 일제에 맞섰으며 서천 내 각 지역에서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1900년 기독교에 입교한 김규배와 아들 김인전은 1906년 한영학교를 설립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17년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칠 것을 강요한 일제에 맞서 폐교를 선택하였다. 한영학교 출신자들은 서천군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이후 많은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3·1운동 이후 서천에서 수많은 단체들이 조직되어 일제 체제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부터 서천 내 각 지역에서 서천청년회, 서천청년수양회, 마산신진구락부, 서남청년회 등이 설립되어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근대화와 민족 운동을 실천하였다. 1923년 천민 계급의 신분 해방과 평등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한 서천형평분사가 창립하여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투쟁하였다. 농민운동도 활발하여 1920~1930년대에 농민의 70%를 점하는 소작농들이 수리 조합 반대, 소작 쟁의 등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3년에는 소작인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한 충남소작인상조회 서천지회가 결성되었다. 한편, 1920년대부터 서천 각지에서 노동조합과 노동 야학 등이 조직되어 노동자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1920~1930년대 서천에서는 각 부문에서 일제 체제에 맞서는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군산과 같은 생활권으로 간주되어 신간회, 청년동맹 등과 같은 강력한 사회 운동 단체가 독자적으로 건설되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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