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29
한자 近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헌주

[정의]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에 이르는 시기까지 충청남도 서천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후기 이래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는 서천군, 한산군, 비인현 등 3개의 군현이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행정 구역 체계는 갑오개혁 이후의 개편 과정에서 서천 지역이 속하였던 홍주부(洪州府)도 22개 군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서천 지역은 서천군, 한산군, 비인군 등 3개의 군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914년 3월 당시 서천군·한산군·비인군의 세 지역이 통폐합되어 현재의 서천군으로 명명되었다. 개항 이후 서천의 사회 경제적 변화와 서천 지역에서 일어난 각종 저항 운동의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천 지역의 경제]

조선 시대 이래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 속한 한산, 서천, 비인군에서 5일장이 발달하였는데 양상은 조금씩 달랐다. 1830년대 기준으로 서천군에는 읍내장[2일, 7일]과 길산장[4일, 9일], 대치장[4일, 9일]이 열렸고, 한산군에는 읍내장[1일, 6일], 신장[3일, 8일], 장등장[4일, 9일]이 열렸으며, 비인군에는 읍내장[3일, 8일], 판교장[5일, 10일], 종천장[1일, 6일]이 열렸다. 개항 이후 장시에도 일정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1908년 이후 서천군의 대치장과 한산군의 장등장, 비인군의 종천장 등 각 군에서 1개씩의 장시가 폐쇄되었다. 취급 상품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개항 이후 무역·상업 거래가 빈번하게 되면서 서천 지역에도 일본과 청국 상인들이 들어와서 조선인 상인들의 상권을 침탈하였다.

[서천 지역의 동학농민운동]

전국적으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서천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여러 기록들을 종합하면 서천 지역에서는 제1차 농민 봉기 당시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서천 지역에 동학교도들이 들어온 것은 1894년 6월부터였다. 이후 8월 중순부터 동학군 수천 명이 금강 인근에 집결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11월 경에는 동학농민군이 현재의 서천 건지산성을 공격하여 관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11월 19일에는 서천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호남 지역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한산읍과 서천 지역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11월 21일 추가로 파병된 경군(京軍)이 동학농민군 부대를 공격하면서 다시 동학농민군은 수세에 몰렸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경군에게 패하였고 서천읍성은 경군의 차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동학농민군 잔여 세력이 반격을 가하여 12월 3일 경에는 한산 읍성을 함락시킨 후 다시 물러났다.

[서천 지역의 국권회복운동]

서천 지역에는 국권회복운동도 진행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하여 일본에 외교권을 뺏긴 한국인들은 무장 투쟁과 실력 양성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는데, 무장 투쟁에 입각한 국권회복운동을 의병운동이라고 하고, 실력 양성론에 입각한 국권회복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한다. 서천 지역은 의병운동의 거점은 아니었지만 인근의 홍주의 민종식 의병부대가 서천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06년 5월 거병한 민종식의 의병은 서천군의 구병동(九兵洞)과 문장동(文章洞)을 거쳐 서천 지역으로 들어갔다. 민종식 의병은 서천군에 2일간 체류하면서 병력과 군자금, 군수품을 모집하였다. 이렇듯 민종식 의병부대는 서천에서 홍주성을 공략하기 위한 체제를 정비하였고 전력을 비축하면서 전투에 필요한 자원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서천 지역이 이 시기 의병운동에 크게 공헌한 것이다.

서천 지역의 애국계몽운동은 1907년 경부터 시작되었다. 학교 설립 활동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서천군수 강원로는 1907년 6월에 서천읍 군사리에 서창학교(舒昌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학생 46명, 교직원 3명이 있었던 사립 기산학교, 보통교육과 기독교 전도사 양성을 목표로 하였던 한영학교도 있었다. 이렇게 활발하게 교육운동이 펼쳐진 결과 1909년 5월을 기준으로 이전 6개월 동안 8개 학교가 설립되고 학생 수가 400~500명에 달하였다. 서천 지역에서는 국채보상운동도 전개되었다. 1907년 3월 경 서천 지역 출신으로 국채보상기성회를 주도한 김성희를 중심으로 호서국채보상기성의무사(湖西國債報償期成義務社)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발포하는 등의 활동이 이어졌다. 그러한 결과 신화폐로 10원을 거두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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