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31
한자 愛國啓蒙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헌주

[정의]

1905년 이후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서 전개된 국권 회복 운동.

[배경]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뺏긴 한국인들은 실력양성론에 입각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을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이라고 한다. 애국계몽운동의 사상적 기반은 사회진화론과 문명개화론이었다. 힘에 기반한 인종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결국 한국인도 힘을 키워야 하며, 구체적인 방법은 실업의 진흥과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었다. 충청남도 서천 지역은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된 이후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와 금강을 사이에 두고 하나의 동일한 문화 권역을 공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산 지역으로 유입된 근대 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천 사람들은 교회와 군산의 고등보통학교 교육을 경험하여 서천 지역의 애국계몽운동이 교육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전개]

서천 지역에 애국계몽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은 1907년 서천군수로 부임한 강원로(姜元魯)의 역할이 컸다. 강원로는 1905년 비인군수로 부임하여 인창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1907년 4월 국채보상운동에 의연금을 내기도 하였다. 강원로는 1907년 서천군수로 부임하였고 1908년 6월 서천읍 군사리에 있었던 전주지방법원 서천출장소 건물을 이용하여 서창학교(舒昌學校)를 설립하였다. 서창학교는 강원로가 지역 내 뜻있는 인물들과 의논하여 세운 것이다. 일반 사립학교로는 한산군 동하면 하계동에 기산학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산학교는 한산 이씨 문중의 이승휴 외 6인이 발기인이 되어 설립하였으며, 교장은 이종식, 학생수는 46명, 교직원은 3명이었다. 또한 1909년 4월 인가받은 사립 한영학교도 있었다. 한영학교는 기독 진신학교와 같이 남장로교 계통에서 고등 보통 교육과 기독교 전도사 양성을 목표로 한산군 남하면에 설립하였다. 교습 과목은 중학예과, 성경, 국어, 한문, 작문, 습자, 산술, 수학, 지리지[地誌], 역사 등이었으며, 교장은 부위렴, 교사는 총 4명, 보통과 학생 10명, 고등과 학생 16명이었다. 그 외에도 기독진명학교, 계창(啓昌)학교, 한산영모학교, 한산학교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 11일 「한산대명(韓山大明)」이라는 기사에는 한산 지역의 학교 설립 운동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한산군수 김병제(金丙濟)가 교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각 면장과 유지 등에게 권고한 결과 6개월 동안 8개 학교를 설립하였고 생도가 400~500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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