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28
한자 義兵運動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범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개설]

19세기 후반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각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일어났다. 충청남도 홍주 지역에서는 을미개혁의 의복 제도에 반대하여 광천 일대에서 의병 모집이 시도되었다. 단발령이 발표되자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의 움직임이 나타났으나 서천 지역에서는 구체화되지 못하였다. 본격적인 의병 활동 움직임은 1906년 1월 나타났다. 홍주 일대에서 유림 1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의병 창의를 결의하였다. 유림들은 충청도 부여, 정산, 청양, 홍산 일대의 유림과 연합하여 홍주부에서 창의하기로 하였으며 단발령 철회도 요구하였다. 최익현과 민종식도 함께 의병 투쟁을 시작하였는데, 서천 지역의 의병 운동은 바로 이때 창의한 민종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종식이 이끈 의병 부대는 홍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는데,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 요구를 전국에 보내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황무지 개간권 요구는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의도’라고 비판하였으며, 1906년 3월 충청남도 예산군 광수장터에서 300여 명의 병력을 모아 홍주 의병을 결성하였다. 민종식은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를 지낸 인물이었다. 민종식은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고 충청남도, 전라북도 지역의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준비를 하였다. 홍주 의병은 홍주성을 진격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흩어졌다. 민종식은 호남 의병장 김동신의 도움을 받았고, 임병찬은 금강을 건너 충청남도 서천 지역으로 이동하여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민종식 휘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충청남도 홍산군 지치동에서 재기의 깃발을 세웠다. 5월 12일, 민종식 의병 부대는 서천군 구병동과 문장동을 거쳐 서천읍으로 들어가 1,000여 명을 이끌었다. 비인과 판교 일대를 거쳐 남포 지역에 이르자 여러 사람들이 호응을 하였다. 민종식 의병 부대는 서천군에서 2일간 머무르면서 관아와 민가에서 군자금을 모으고 무기와 군수품을 확보하였다. 민종식 의병 부대는 서천에서 시작하여 홍주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정비를 갖추고 전력을 마련하여 다수의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였다. 그러므로 서천 지역은 민종식 의병 부대가 탄생하였던 곳이자 보급 기지 역할을 하고 있던 셈이다.

민종식 의병 부대가 서천 지역에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서천 지역에는 민종식과 더불어 척화의 뜻을 가진 인물들이 다수 존재하였다. 서천 지역은 대표적인 척화파였던 최익현이 여러 문인을 만나기 위한 장소였다. 또한 민종식 의병에게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구병대 또한 서천군 시초면 출신이었다. 또한 서천 지역은 민종식을 지원하는 지주층이 넓게 형성되어 있어 의병들의 인적 자원과 물적 지원을 제공하는 공급처였다. 이처럼 이름 모를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한뜻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민종식 의병 부대가 패한 이후 서천 지역에서는 의병 봉기 기록이 많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1908년 3월 서천군 부근에 의병이 나타나 일본군과 교전을 한 기사, 한산군 부근에서 의병 40여 명이 나타나 강경에 주둔한 일본군과 교전한 기사, 5월에는 의병 10여 명이 한산군 읍내를 쳐들어갔으나 순사 주재소를 격파하였다는 기사가 확인된다. 비인군에서도 산발적인 의병 활동은 확인된다. 1908년 3월 의병 14명이 비인군 읍내 인창학교를 습격하여 약탈하였다는 기사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의병 진압 작전으로 인하여 의병의 활동 양상은 줄어들었다. 1909년 2월 이후 주변 지역에서 소수의 의병이 출몰하였으나 체계적인 의병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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