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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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舒川浦 |
이칭/별칭 | 기벌포,진포,장암진,수군진,조선 시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에 있었던 조선 시대 수군진.
[개설]
서천포(舒川浦)는 조선 시대 서천군에 설치된 수군진 중 하나이다. 서천군에 있던 수군진영으로는 서천포와 마량진이 있었다. 마량진에는 첨사가 파견되었고, 서천포에는 만호가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서천포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서천포는 금강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있어서 수로 교통의 중심지이고, 군사적으로는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동쪽으로는 금강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조운로와 연결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전라도의 곡창 지대와 맞닿으며, 서쪽으로는 서해와 접한다. 예전부터 서천포가 자리한 서천군 내 금강 하구는 충청도와 전라도 내륙으로 진입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 같은 이유로 삼국 시대부터 백제의 수도를 지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으며, 당나라와 교류하는 창구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서천포는 서천군의 읍치 남쪽 26리[약 10.4㎞]에 있었다. 수군만호 1인이 배치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장암진이었다. 1514년(중종 9)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1,311척[약 437m]이고 높이는 9척[약 3m]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내용]
조선 전기 서천포에 배치된 병선은 대맹선 1척, 중맹선 4척, 소맹선 1척, 무군소맹선 5척으로 모두 11척이었다. 조선 후기 서천포에 배치된 병선은 전선(戰船) 1척, 방선(防船) 2척이었다. 조선 후기 기록에 따르면, 서천포 소속 병력은 서천군 196명, 임천군 245명, 한산군 247명이었다.
[변천]
삼국 시대에는 서천포를 기벌포라고 불렀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진포, 서천포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시 신라는 당나라 수군을 금강 하구에 있던 기벌포에서 무찔렀다. 기벌포 해안에 있던 성이 바로 장암진성이다. 서천포는 고려 시대 장암진이라고 불렸다. 당시 기록에 “큰 바위가 해문에 의지하여 있다.”라고 하여 지명 유래가 확인된다.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중요하게 판단하여 상륙한 지점이고, 고려 후기 최무선이 왜적을 격파할 때 중요 거점으로 생각한 역사적인 장소였다.
[의의와 평가]
서천포는 서천군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전라도 내륙을 방어하는 중요 요충지였다. 교통의 중심지로서 지역성과 역사성을 갖춘 중요한 사적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