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393
한자 韓山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 후기
집필자 박범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에 있었던 조선 시대 지방 행정 구역.

[개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조선 시대 지방 행정 구역은 부, 목, 군, 현이 있었다. 부에는 종2품 부윤, 정3품 대도호부사, 종3품 도호부사가 파견되었고, 목에는 정3품 목사, 군에는 종4품 군수, 현에는 종5품 현령과 종6품 현감이 파견되었다.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에는 종4품 한산군수가 파견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종9품 훈도 1인이 배치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군수만 남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한산군(韓山郡)은 백제 시대 마산현(馬山縣)이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러 가림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연간에는 현의 명칭을 한산으로 바꾸었으며, 명종 연간에는 감무가 파견되었다. 이후 승격되어 한주(韓州)라고 개칭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 한산군이라 하였고, 1914년 행정 구역이 개편될 때 서천군에 병합되어 한산면이 되었다. 조선 시대 지금의 서천군 한산면금강 하류에 연하여 포구와 해창(海倉)이 존재하였고, 강을 통한 수운 교통망 또한 발달하였다. 서천군 한산면 내에서 모시가 생산되어 조선 시대부터 지역의 특산물이 되었다.

[관련 기록]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의 경관에 대하여서는 고려 후기 문인학자인 이색(李穡)[1328~1396]이 남긴 시문을 통하여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이색이 읊은 ‘한산팔영(韓山八詠)’에는 고향 한산에 대한 풍경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숭정암송(崇井巖松), 일광석벽(日光石壁), 고석심동(孤石深洞), 회사고봉(回寺高峯), 원산수고(圓山戍鼓), 진포귀범(鎭浦歸帆), 압야권농(鴨野勸農), 웅진관조(熊津觀釣)” 등, 야산, 절벽, 금강, 사찰, 마을과 같이 한산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내용]

조선 전기 한산 지역의 사회 경제적 위상은 비인현 및 서천군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좋았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기재된 호수와 인구를 보면 서천군보다는 작았으나 비인현에 비하면 2배 이상 큰 규모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한산군, 서천군, 비인현의 인구 규모는 비슷하여졌다. 다만 다수의 제언(堤堰)을 통하여 농업이 발달한 정황을 읽을 수 있다. 제언의 경우 한산군에는 16개, 서천군에는 22개, 비인현에는 1개가 있었다. 제언의 수가 증가한 한산군은 전결 수 또한 급증하여 농업 생산량이 크게 확대된 것을 볼 수 있다.

[변천]

한산 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은 금강 연안을 중심으로 진과 포구가 매우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상지포, 우포, 기포, 와포, 아포, 진포, 죽산진이 있었다.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20세기 중반까지도 상당수의 한산 지역 물산이 뱃길을 통하여 운송되었다. 특히 모시라는 한산 지역의 대표 작물이 재배되고 유통되면서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와 함께 보부상이 발달하였다. 한산의 모시를 대상으로 저산팔읍보부상단이 결성되었는데, 저산팔읍보부상단은 부여, 정산, 홍산, 임천, 비인, 남포, 서천을 비롯하여 한산을 포함하는 지역 내 보부상단을 가리킨다. 금강 하류 지역의 보부상단은 한산모시를 주된 거래 상품으로 취급하였다.

[의의와 평가]

한산군은 서천 지역 내에서 중요한 상업 거점에 해당한다. 지리적 입지에서 금강의 수운과 바다의 해운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한산모시를 통한 지역 내 상권 유통은 한산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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