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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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浦口 |
이칭/별칭 | 나루터,도(渡),진(津),포(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범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에 있었던 배가 드나들던 길목.
[개설]
충청남도 서천군 지역에는 말이나 수레보다 더 많은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배가 포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서천군으로부터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경, 부여, 공주, 부강까지 미곡이나 소금, 어물을 실은 상선들이 서천 지역 포구를 거쳐 갔다.
[조선 전기 서천 지역의 포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서천 지역의 포구가 다수 정리되어 있다. 한산군에 상지포(上之浦), 우포(朽浦), 기포(岐浦), 와포(瓦浦), 아포(芽浦), 진포(鎭浦), 죽산진(竹山津)이 있었고, 서천군에는 아포(芽浦), 길산포(吉山浦), 용당진(龍堂津), 진포(鎭浦)가 있었다. 다만 비인현에는 포구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서천군과 한산군에 형성되어 있던 나루와 포구를 통하여 서천 지역이 수로 교통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서천 지역은 금강을 따라 서해로 내려오는 뱃사람들과 금강을 따라 강경, 부여, 공주 등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마주치며 언제나 북적였다. 따라서 서천 지역은 상권이 독자적으로 형성되면서 상업이 발달하는 조건을 갖추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급하였다. “오서산 앞쪽에서 나온 한 맥이 남쪽으로 가서 성주산이 되었고, 산 서편은 바로 비인과 남포이다. 땅이 아주 기름지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접하여 있어, 생선과 소금, 벼를 거래하는 이익이 있다. 산 남쪽은 서천, 한산, 임천인데 진강가이다. 땅이 모시 가꾸기에 알맞아 모시로 얻는 이익이 전국에서 첫째이다. 강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뱃길의 편리함이 한양보다 못하지 않고, 진강 남쪽은 바로 전라도와 경계이다.”
[조선 후기 서천 지역의 포구]
조선 후기 서천 지역은 금강을 끼고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업이 활기를 띠었으며, 모시가 생산되면서 저산팔읍으로 독자적인 상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수운의 발달과 더불어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포구가 금강 연안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포구나 나루터는 도(渡), 진(津), 포(浦) 등으로 불리었다. 포구나 나루터의 존재는 서천 지역에서 간행된 읍지나 고지도를 통하여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한산군 지역에는 9곳, 서천군 지역에는 11곳의 포구가 있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조선 후기 금강에 있던 서천 지역 포구에는 장시도 활성화되었다. 지역마다 금강은 물길을 낳고, 물길은 사람과 물산을 이동시켜 장시를 더욱 발달시켰다. 서천군 지역에는 한산모시를 거래하던 한산장, 서천장, 비인장 등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