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3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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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巖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오치훈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에 있었던 고려 시대 군사 기지.
[제정 경위 및 목적]
장암진(長巖鎭)은 고려 시대의 군사 기지로 금강과 서해안의 접점 지역에 있었다. 장암진이 있던 곳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조세 운반선이 지나가는 교통로이자 군사 요충지였기에 특별히 진(鎭)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 좌평 성충이 기벌포(伎伐浦) 방어에 대하여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의 주석에 기벌포는 장암(長巖) 혹은 손량(孫梁), 지화포(只火浦) 혹은 백강(白江)으로 되어 있다. 즉, 기벌포는 현재의 금강 하구 장암진성 일대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장암진이 유배지로 등장한다. 공민왕 대의 석문성(石文成), 우왕 대의 신인보(申仁甫)가 장암진에 유배되었으며,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평장사 두영철(杜英哲)이 장암진에 유배된 일을 계기로 지어진 「장암(長巖)」이라는 고려가요가 이제현(李齊賢)에 의하여 한문으로 번역되어 전한다.
한편,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1511년(중종 6) 서천포에 성을 짓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서천군 관방조에 의하면 고려 시대의 장암진에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이 배치된 서천포영(舒川浦營)을 두었다고 되어 있으며, 1514년(중종 9) 둘레 1,311척[약 437m], 높이 9척[약 3m]의 석성을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러한 석성이 바로 서천 장암진성이며, 따라서 장암진성은 1511년 축성을 시작하여 1514년 완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 서천군 진보조(鎭堡條)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관방조와 유사한 내용을 기록하면서도 마지막에 “큰 바위가 해문에 의지하고 있다[有大石據海門].”라고 하여 장암의 지명 유래를 덧붙였다.
[내용]
고려 건국 이전에 백강전투, 기벌포전투 등이 장암진에서 일어났으며, 고려 후기 왜구를 물리친 진포대첩 역시 장암진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추정된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서천포진을 설치하고 성곽을 축조하였는데, 바로 서천포영성 혹은 서천포진성이다. 현재는 장암진성이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