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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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軍事制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천군의 군사제도.
[개설]
서천 지역의 군사제도는 조선 전기에는 진관체제를 바탕으로 짜여져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속오군제와 영장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 전기의 군사제도]
조선 시대 지방의 군사제도는 세조 연간에 확립되었다. 이때 정비된 군사제도를 진관체제라고 부른다. 진관체제는 지방의 거점 지역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거진 주변 지역을 제진(諸鎭)으로 묶여서 거진 중심으로 지역을 방어하는 군사제도였다. 진관체제에서는 행정 조직을 군사 조직과 함께 활용하였다. 평시에는 주진(主鎭)의 관리 아래 있었으나 전시에는 진관 단위로 군사 행동을 하였다. 충청도는 4개의 진관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공주목 중심의 공주진관, 충주목 중심의 충주진관, 청주목 중심의 청주진관, 홍주목 중심의 홍주진관이 있었다. 한산군은 공주진관에, 서천군과 비인현은 홍주진관에 속하였다. 진관의 주진은 종3품의 병마첨절제사였으며, 한산군수와 서천군수는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가 되었다. 그리고 비인현은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가 되었다. 진관체제에서 병력의 기본은 양인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평시에 농사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징발되어 근무지로 나아갔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한산군의 군정은 시위군 6명, 수호군 5명, 선군 206명이었고, 서천군의 군정은 시위군 9명, 진군 224명이었고, 비인현의 군정은 시위군 4명, 수호군 28명, 선군 57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의 군사제도]
조선 후기의 군사제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군대 운용, 전술 변화, 지방군의 치안 문제, 군역의 부세화 등에서 변화가 생겼다. 중앙군은 오위 제도가 형해화되면서 대신 5군영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수도 방어를, 총융청과 수어청은 수도 외곽 방어를 전담하였다. 각 군현에는 대장, 중군, 별장, 천총과 같은 새로운 지휘관이 등장하였다. 지방군은 진관체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속오군이 편성되었다. 임진왜란 중 도입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병법에 따라서 속오군이 창설되고 속오군을 지휘하는 영장이 새로 설치되었다. 지방군의 군사 지휘 체계와 군사 훈련 및 점검, 치안 유지 등에 매우 큰 변화가 나타났다.
조선 전기에 비하여 조선 후기 서천 지역 군병의 수는 매우 크게 늘어났다. 바다와 금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서천 지역의 군사적, 전략적 위상이 높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전국에는 당상관 이상의 무관을 영장으로 파견하였다. 평상시에는 훈련을 전담하고, 전시에는 군병을 지휘하고 통솔하였다. 삼남 지역에는 영장 16명이 파견되었다. 현종 대에는 도적이 전국에서 횡행하자 영장이 토포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영장제는 특정 지역을 방어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주요 거점을 몇 개 진영으로 나눈다는 점은 진관체제와 유사하였다. 영장제는 각도의 진관과 거리를 비교하여 5개의 영을 설치하였다. 충청도에는 홍주, 해미, 청주, 공주, 충주가 있었다. 홍주는 전영장, 해미는 좌영장, 청주는 중영장, 공주는 우영장, 충주는 후영장이 배치되었다. 진관체제와는 달리 비인, 서천, 한산은 모두 전영장 소속으로 편제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