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746
한자 李承達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송곡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 2월 2일연표보기 - 이승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승달 신장리 장터 만세 시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승달 「보안법」 위반으로 3년 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56년 2월 7일연표보기 - 이승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이승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이승달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송곡리지도보기
활동지 신장리 장터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승달(李承達)[1898~1956]은 1898년 2월 2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송곡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이승달은 1919년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자, 송여직, 송기면, 유성렬 등과 함께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장날인 3월 29일 미리 제작한 태극기 200여 매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대와 함께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하여 출동한 경찰이 현장에서 송여직, 송기면 유성렬 등 중심인물을 연행하였다. 이에 이승달은 이동홍·양재흥·박재엽·정일창·김인두·고시상 등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연행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돌을 던지며 안으로 들어가 경찰을 구타하고 창문과 책상, 의자 등 시설과 집기류를 파괴하였다. 마침내 주재소를 파괴하고 연행된 동지들을 모두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한산면을 거쳐 서천면 방면으로 행진하던 중 서천군수 권익채(權益采)의 권유에 따라 해산하였다.

이승달은 1919년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1919년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하여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56년 2월 7일 사망하였다.

[묘소]

이승달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승달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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