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750
한자 鄭日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 8월 18일연표보기 - 정일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정일창 신장리 장터 만세 시위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9일 - 정일창 「보안법」 위반으로 3년 형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41년 6월 23일 - 정일창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6월 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45년 7월 4일연표보기 - 정일창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정일창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정일창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지도보기
활동지 신장리 장터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정일창(鄭日彰)[1899~1945]은 1899년 8월 18일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자, 정일창은 3월 중순경 이근호·임학규·유성열 등과 협의하여 신장리 장날인 3월 29일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정일창은 거사 당일 신장리 장터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면서 만세 시위에 돌입하였다. 경찰이 만세 시위 군중을 해산하기 위하여 출동하였고, 송기면·유성열 등 주도자를 체포하여 연행하자, 경찰의 탄압에 분노한 시위대의 규모는 2,000명으로 늘어났다. 정일창은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이동홍·고시상·양재흥·김인두 등과 함께 구금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정일창은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하여 돌을 던져 창문을 깨고 들어가 책상과 의자 등 기물을 파손하고 경찰들을 구타하였다. 이에 송기면·유성열 등 감금되어 있던 인사들을 모두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한산면을 거쳐 서천면 방면으로 행진하다가 해산하였다.

정일창은 1919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고하였으나 1919년 7월 26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하여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뒤 1941년 6월 23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국가총동원법」 위반으로 6월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일창은 1945년 7월 4일 사망하였다.

[묘소]

정일창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정일창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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