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산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14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삼산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할 지역 길산장 -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삼산리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삼산리에서 열렸던 조선 시대 오일장.

[개설]

길산장은 조선 후기 이래 4일과 9일에 열렸던 서천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장시이다. 길산장서천군 서천읍 삼산리 길산마을에 개설되었다. 길산장길산천 천변에 형성되었으며, 서천 지역의 농산물과 서해안에서 유입된 해산물이 거래된 대표적인 장시이다. 특히 길산포가 발달하면서 길산장에는 어물 시장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므로 서천 지역의 경우 비인, 한산, 서천의 읍치에 자리한 읍내장보다 길산장의 규모가 더 컸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길산장의 기록은 다른 장시와 마찬가지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국문헌비고』에 기록된 서천 지역의 장시는 모두 9곳이다. 당시 길산장은 4·9일에 열렸으며, 한산의 읍내장은 1·6일, 서천의 읍내장은 2·7일, 비인의 읍내장은 3·8일에 열렸다. 비인 판교장은 5·10일에 열려서 길산장과 개시일이 같은 장은 한산의 장등장뿐이었다. 이로 보아 길산장이 서천 지역의 중심 장시 기능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국문헌비고』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길산장에서는 주로 모시가 거래되었다.

[내용]

길산장은 상품 거래가 활발하면서 먹을 것이 풍부하다 보니 주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거지들이 주로 길산장 주변에 있던 질메다리에 많이 모였다고 한다. 또한 길산포와 연계되면서 포구 노동자들이 출현하고, 정미소가 등장하며, 백정들의 조직인 형성사가 결성되었고, 무산자들을 위한 야학도 설립되었다. 길산장을 통하여 서천 지역의 근대화 물결이 유입된 셈이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길산장은 기능을 많이 잃었다. 1926년 간행한 『서천군지』에 따르면 서천 지역의 장시는 서천장, 길산장, 한산장, 신장, 판교장, 비인장 등 6곳이었다. 길산장의 개시일은 조선 후기와 동일하게 4·9일이었으며, 길산장과 개시일이 겹치는 장시는 없었다. 『서천군지』는 거래 물목을 농산물, 수산물, 직물, 축류, 기타 등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전체 거래액은 신장이 78만 엔, 판교장이 32만 엔, 서천장이 27만 엔이었으며, 길산장은 2만 3000엔에 불과하였다. 이로 보아 길산장의 장시세가 매우 작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만 3000엔 중에서 가장 큰 규모는 농산물로 1만 4000엔, 다음으로 수산물은 5,800엔 , 직물이 2,300엔이었으며, 축산물 거래는 전무하였다.

[의의와 평가]

길산장길산포와 더불어 서천 지역 경제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주변 지역의 장시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길산장은 더 이상 서천 지역의 중심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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