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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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마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효경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서 정월 초에 큰 규모로 행하여지는 당제에 대한 이야기.
[개설]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마량리는 바다가 육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마량만(馬梁灣)의 초입에 있는데, 조선 후기에는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수군첨사(水軍僉使)]가 관할하던 마량진(馬梁鎭)이 설치되어 있었던 역사의 고장이다. 191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어업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하면서 큰 배를 이용한 고기잡이가 성행하였던 마을이기도 하다. 또, 수군첨사가 심었다는 동백나무 숲과 동백정(冬栢亭)이라 불리는 정자가 아직 남아 있다.
마량리에서는 해마다 정월 초에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며 당굿형 마을 제사인 마량리 당제를 지내는데, 마량리에서 당제를 모시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수군첨사와 관련이 깊다. 약 400년 전 수군첨사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뱃길이 무사하고 마을이 평온하려면 바다 위에 떠 있는 꽃을 가져다가 마량리 언덕에 심고 제단을 마련하여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고 한다. 이에 수군첨사는 동백정에 동백나무를 심고 제당을 만들어 어로와 운항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으며, 첨사가 죽고 나서는 마을 사람들이 뒤를 이어 대대로 제사를 올리면서 산신을 모심과 더불어 다섯 해신을 함께 위하였다. 그렇게 형성되어 전하여 오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마량리 당제이다. 그리고 수군첨사가 제단을 만들면서 제단 주변에 심은 동백나무는 자라서 숲을 이루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이 되었다.
[북을 울리며 마량리 수군에게 신고하던 마량진 해역]
바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만 각각의 행정 구역에 의하여 구획이 구분된 공간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행정 구역에 따라 바다도 역시 관할 구역으로 관리된다. 전근대 사회에도 행정 구역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망망대해를 어떻게 관할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조선 시대에 바다는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여야 하는 곳으로 수군(水軍)이 관리하는 곳이었다. 곳곳에 수군진(水軍鎭)을 배치하여 군사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 마량진은 수군첨사가 관할하던 거진(巨鎭)[각 도에 설치하였던 중간 규모의 조선 시대 군사 진영]이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소진(小鎭)과는 위상이 남달랐으니, 서천 지역의 바다를 항행하던 배들은 자신이 해당 해역에 들어왔고 해당 해역을 지나고 있음을 수군에게 알려야 하였다. 오늘날도 어선이나 관광객을 실은 유람선이 바다를 항행할 때도 개인의 인적 사항을 신고하고 선박의 출항과 입항을 알려야 한다.
조선 시대의 선박이 항행하던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개항기에 오횡묵(吳宖默)이 펴낸 『지도총쇄록(智島叢瑣錄)』이 있다. 『지도총쇄록』은 1895년에 오횡묵이 한양에서 상선을 타고 전라도 지도 지역[현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까지 항해하면서 기록한 일기이다. 바다를 항행하면서 곳곳에서 제사를 행하던 뱃사람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진도까지 가는 도중 충청도 해역에서 제사를 3번 행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충청도에는 16개의 군진이 있었는데, 제사를 지낸 곳은 모두 거진이라는 특징이 있다. 첫 제사를 행한 곳은 현재 충청남도 서산시에 속하는 평신진(平薪鎭)이고, 그다음 제사 장소는 충청남도 태안군에 속한 안흥성(安興城)이고, 마지막 제사 장소는 서천군에 속한 마량진이다. 이들 수군진은 모두 거진이었으며 종3품의 수군첨절제사가 관리하였다. 북을 울리고 명태와 과일을 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러한 제사가 각기 다른 행정 구역에 속한 해역을 지나게 됨을 신고하는 행정적 절차인 동시에, 해당 해역을 돌보는 해역신(海域神)에게 자신들의 안전을 의탁하는 종교적 의례임을 알 수 있다.
[신성한 종교적 공간인 마량리 당집과 동백나무 숲]
마량리에는 역사적 종교 공간이 두 곳 있다. 하나는 약 400여 년 전에 마량진의 수군첨사가 계시를 받아 만든 제단이다. 수군첨사가 제단을 만들 당시 제단에는 불상(佛像)을 모셨는데, 그 후 수군첨사가 죽고 나서 마을 사람들이 뒤를 이어 제사를 올리게 됨에 따라 산신과 다섯 해신을 함께 봉안하고 당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제단이 있던 장소가 현재 마량리 당제가 베풀어지는 당집이니, 당집과 당집 주변의 동백나무 숲은 오랜 전통을 지닌 성소(聖所)라고 할 만하다. 현재 당집은 마을 뒤편에 있는 동백정의 중앙에 있다. 2001년에 서천군에서 건축비를 지원하여 새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목조 기와집으로 건립하였다. ‘풍어제사당(豊漁祭祠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당집 안에는 나무로 만든 신상(神像)이 여럿 있는데, 각시서낭 부부와 각시서낭 아들 부부가 중앙 선반 위에 모셔져 있다. 왼쪽 선반에는 종이 고깔을 쓴 승려 목상이 있고 오른쪽 아래에는 서낭신이 타는 어마(御馬)와 마부가 목판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또 다른 종교적 공간으로 기우제당이 있다. 조선은 농업을 중시하던 사회였기에, 농사에 필요한 물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비가 오지 않으면 모를 심을 수 없으므로 봄철에 곳곳에서 비를 비는 기우제를 지냈다. 마량리가 속한 비인현의 현감은 왕의 명령으로 축문과 향을 받아 기우제를 지내고자 기우제 장소를 정하였다. 비인현의 기우제당은 모두 5곳으로 비가 오지 않으면 장소를 변경하여 가며 비를 빌었다. 5차에 걸친 비인현의 기우제 장소 중 마량리는 5번째에 속하였다. 내륙의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나서 비가 오지 않으면 해안 쪽으로 나와 기우제를 지내는데, 4번째 기우제는 현재의 월호리 월하성마을 뒤편 옥녀봉에서 지냈고, 마지막 다섯 번째 기우제를 마량리에서 거행하였다. 기우제를 지낸 장소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량리에서 현재까지도 중요한 종교적 공간으로 여겨지는 동백나무 숲과 당집 주변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옥녀동이나 동백나무 숲은 일대에서 위치상 높은 장소에 해당하기에, 비를 주관하는 천신(天神)의 하강처로 여겨졌을 만하다. 이처럼 농업과 어업을 함께 중시하던 마량리에서는 바다를 향하여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고 하늘을 향하여 한 해 농사의 풍흉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비를 바랐으니, 이러한 간절한 소망에 대응하여 다양한 의례 요소가 포함된 마을 신앙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풍어와 뱃길 안전을 위해 비는 당제]
마량리에서는 당제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옛날 마량리 해변가에 살던 한 할머니가 남편과 자식을 차례로 마량 바깥의 바다에서 잃어버리고 실의에 차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였는데,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날 해변가에 나온 할머니는 우연히 마량 뒤편에 있는 섬인 연도(煙島) 부근에서 물줄기를 타고 승천하는 용의 꼬리를 보았다. 그때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서 겪는 사고가 바로 이 용신(龍神)을 모시지 않은 데서 비롯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날 밤 할머니 꿈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마을 뒤편 백사장에 나가면 바다에서 떠내려온 것이 있을 터이니, 그것으로 신당을 지으라고 하였다. 이튿날 모래사장에 나가 보니 과연 떠내려온 것이 있어 열어 보니, 그 안에는 서낭 다섯 분과 동백씨 한 뭉치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꿈속에서 백발노인이 사라졌던 장소에 동백씨를 뿌리고 그 옆에 신당을 지어 서낭 다섯 분을 모셨다. 그 후로는 마을이 평안하여졌고, 어부들도 더는 바다에서 사고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
수군첨사의 꿈 이야기가 관군의 것이라면 이 할머니의 꿈 이야기는 민간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하여, 당제가 해난 사고의 방지와 뱃길 안전이라는 구체적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량리 당제의 본제 진행 순서]
마량리 당제 는 서천 지역의 다른 마을 제사와 비교하면 비교적 대규모로 치러진다. 당제의 절차도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고 제사 기간도 원래는 약 열흘에 걸쳐 진행되는데, 섣달그믐날 선창제를 시작으로 정월 초사흗날부터 이른바 ‘본제(本祭)’에 해당하는 의례가 이어지는데, 제주가 홀로 근신하며 지내는 편탕제, 당골이 주관하는 당굿, 마당제, 대내림, 용왕제, 샘제를 모시고 나서 초여드렛날이나 초아흐렛날 중 길일을 가려서 장승을 깎아 세우고 거리제를 지낸다. 여기서 맨 처음 지내는 선창제와 가장 마지막으로 치러지는 거리제를 제외하고, 본제에는 여섯 종류의 제사를 모시며 이를 총칭하여 ‘당제’ 혹은 ‘윗당제’라고 부른다.
본제의 처음인 편탕제는 정월 초사흗날 새벽 3시 무렵[현재는 오전 9시 무렵]에 당집에 모신 신령들에게 편탕을 올리는 의례인데, 편탕은 쌀로 만든 떡국을 가리키며 비린 것을 넣지 않고 끓인다. 곧 편탕제는 새해에 떡국으로 차례를 지내듯이 마을 사람들이 신령에게 편탕을 올리며 세배를 하는 것이다. 편탕제가 끝날 즈음에 배를 운영하는 선주들이 배의 기를 앞세우고 산에 오르면, 제사를 주관하는 화주(化主)가 길지(吉紙)[사람에게 길한 일을 가져다주다는 종이]를 한 장씩 선주에게 건넨다. 그러면 선주는 배의 기에 길지와 함께 제당 옆의 동백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조금 꺾어서 매다는데, 이러한 절차는 당산 신령이 지닌 영험함과 복을 배의 기에 실어서 각자의 배로 가지고 가려는 상징적 의례이며, ‘뱃기오르기’, 또는 ‘당오르기’라 하여 마량리 당제에서 대내림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절차이다.
편탕제를 마치면 당굿을 진행한다. 여느 마을 당제와는 달리 마량리 당제는 ‘영신’이라고도 불리는 당골이 진행하는 당굿이 포함되어 있는데, 충청도 특유의 무속인 앉은굿이 바탕이 되는 형식이다. 당골은 마을 내의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여 주던 무속인으로서, 간단하게 경문을 외우며 비손을 하거나 전문적인 경문을 외우는 독경쟁이를 지칭한다. 당굿은 해마다 다르게 진행되는데, 법사가 주관할 때는 경을 외고 축언을 곁들이며, 무당이 할 때는 비손 위주로 진행된다. 당굿을 마치면 소지를 올리고 제사상을 물리고 나서, 동백정 앞의 넓은 마당에서 간단하게 마당제를 지낸다. 마당제는 곧이어 행하여질 대내림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마당에 간단하게 제사상을 차리고, 법사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축원을 한다.
대내림은 신의 뜻을 확인하는 중요한 절차이며 마량리 당제의 절정이다. 당기(堂旗)를 쥐고 대잡이가 서면 이장이 마을 일이나 그해에 많이 드는 고기의 어종 등을 물으면 대에 강림한 신이 대를 흔들어 질문에 답한다. 마을의 길흉을 점치거나 신령들이 제사를 잘 받았는지를 묻기도 한다. 대내림으로 신의 뜻을 알아보고 나서는 밀물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당기를 앞세우고 용왕제를 지내러 간다.
용왕제는 동백정 아래의 ‘큰안이’라 불리는 바닷가에서 지낸다. 바닷물이 가장 많이 밀려 들었을 때에 바닷가에 백지 한 장을 깔고 제물을 차려 놓는다. 돼지머리, 백설기, 명태포, 삼색과실, 김 등을 올리고 법사가 경문을 외고 나서 동서남북의 용왕에게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마친 후 백지에 떡과 제물을 조금씩 싼 용왕밥을 바다에 던져 넣는다. 제물로 올렸던 모든 제물을 바다로 던져 넣어 푸짐하게 대접하는 것으로 용왕제를 마친다.
우물을 사용하던 시절에는 용왕제를 마치고 나서 샘제를 지냈으나, 1970년대 이후 식수로 지하수와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지면서 샘이 없어졌고 샘제도 자연스레 중단되었다. 이처럼 마을 신앙에는 주민들이 영위하는 생활상의 변화가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을 위한 장승제]
장승은 마을 바깥에서 마을로 들어갈 때 처음으로 만나는 존재이다. 장승을 만나면 그곳부터 마을이 시작됨을 알 수 있고, 마을을 벗어나 출타할 때는 장승 주변에서 여행 중의 안전을 기원하는 염원을 담아 인사를 올리기도 한다. 마량리 마을 입구에도 마을을 수호하는 장승 2기가 세워져 있다. 장승 2기 모두 강력한 무력(武力)을 지닌 장군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장승의 얼굴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가는 눈을 45도로 치켜뜨고 마을로 들어오는 온갖 액운과 잡귀를 막고자 연신 눈망울을 굴리는 모습의 장승이다. 마을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를 표시하는 장승에 대한 의례는 마량리 당제에서 모신 신령을 모두 보내고 마지막에 남아 있는 잡귀 잡신까지 마을 밖으로 내보내는 과정인 셈이다.
정월 초여드렛날이나 아흐렛날이 되면 장승제를 지내는데, 새로 제작한 장승을 묵은 장승 옆에 세우고 푸짐하게 상을 마련하여 올리고는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비손한다. 그러고 나서 제물을 큰 그릇에 담아 들고 마을 밖으로 나가면서 길가에 조금씩 부어 거리에 있는 잡신을 대접한다. 제물을 쏟아 낸 후 들고 있던 부엌칼을 마을 바깥으로 던져, 칼끝이 마을 안쪽을 향하면 잡귀 잡신이 마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여기므로 칼끝이 마을 바깥쪽을 향하여 떨어질 때까지 던진다. 모든 잡귀가 나가면 다시는 마을로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를 바닥에 새기는 것으로 모든 제사 절차를 마무리한다. 제사를 마친 후에는 동네 사람들이 마을 회관에 모여 음복을 하며 결산하고, 마을 일을 논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