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한반도 최초로 서천에 전래되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008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범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의 성경 전래에 대한 이야기.

[서천 앞바다에서 세계를 보다]

조선은 사대교린 정책을 고수한 나라였다. 정부의 공식적인 사행 무역을 제외하고는 민간의 교류를 허락하지 않았다. 국경 도시인 의주와 동래를 통하여서만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가능하였으며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였다. 의주를 통하여서는 대륙의 명나라, 청나라와 교류하였으며, 동래를 통하여서는 해양의 일본과 교류하였다. 두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외국과 교류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우연히 조선의 해안에 표류하던 선박이 출현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배를 조선 시대에는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모양이 다른 배라는 뜻으로 조선에서 보던 익숙한 모양의 배가 아니었다. 조선 전기부터 17세기까지 이양선과 표류하는 선박은 가끔 한국의 역사 기록에 등장하였다.

18세기에 들어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서양에서 본격적인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면서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이 서양인들 사이에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시작으로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참여하였다. 서양인들은 대서양을 지나, 인도양을 거쳐 동남아시아를 돌아 동아시아로 진출하였다. 서양인들은 직접 자신들이 건조한 배를 타고 동아시아의 바다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찍이 유럽 국가들은 중국에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많은 선박이 통행하였다. 일본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에는 특히 네덜란드 상선이 왕래하였는데 벨테브레이와 하멜이 조선에 표류하였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바다에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선박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사실 조선인의 눈에 가장 익숙한 이양선은 황당선이라고 불리는 중국 선박이었으나, 본격적으로 유럽의 배들이 조선의 바다를 누비게 된 것이었다.

1816년 9월 4일, 충청남도 서천의 마량진 앞바다에서 수상한 선박 두 척이 나타났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배에는 파란 눈과 노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마량진 바다를 관장하던 마량첨사가 서양인들을 찾아가 만나 보았다.

[마량첨사가 영국 선박에 오르다]

마량진 관할의 서천 앞바다에 등장한 선박은 영국 소유의 함선 2척이었다. 한 척은 선장 머레이 맥스웰이 이끄는 알세스트호였고, 다른 한 척은 선장 바실 홀이 이끄는 리라호였다. 모두 1816년 2월 9일 애머스트가 이끄는 영국 함대 중 일부로 영국을 출발하여 청나라 황제 가경제에게 영국과의 통상을 요구하기 위하여 출발한 선박이었다. 이때 애머스트가 이끈 영국 함대의 규모는 모두 다섯 척이었는데 8월 9일 청나라에 도착하고 두 무리로 나누었다. 애머스트는 가경제를 만나기 위하여서 베이징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인근 해안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일부는 영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조선을 탐사하기로 결정하였다. 황해도 앞바다에 도착하여 남하하고 충청도 앞바다를 지나던 중 마량진 부근에 나타났다. 다른 이양선은 단순한 표류였기 때문에 접촉하는 일이 별로 없으나 영국 함선은 조사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조선인 관리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조선에 이양선 출현이 자세하게 알려지게 된 것은 기록 덕분이었다. 마량첨사는 이양선 출현을 충청수사에게 보고하였고, 충청수사는 다시 중앙 정부에 보고하여 영국 함대와의 접촉 사실이 조선의 기록에 남게 되었다. 영국 함대의 선장 바실 홀은 자신의 동아시아 여행 기록을 책으로 남겼는데, 조선과 영국 기록을 대조하여 역사적 의미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바실 홀의 기록에 따르면 마량진 일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개간이 잘 된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고, 경치는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알세스트호가 마량진에 닻을 내리고 부관들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보트를 띄웠다. 당시 알세스트호는 정원 280명의 대형 선박이었다. 소식을 들은 마량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이 현장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육지로 오는 영국인의 보트를 막고 바다 위에서 조우하였는데 육지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영국인들은 조선인을 어떻게 보았을까. 바실 홀의 기록에 따르면 “푸른 색의 큰 양산을 드리워져 있는 배 안에는 흰 수염이 온통 가슴까지 넢고 허리까지 닿았고, 양산 아래 다리를 포개 앉아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마량첨사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는 반대로 마량첨사 조대복은 영국인을 어떻게 보았을까. 충청수사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와 같았다. ·····”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0~90명에 가까울 듯하였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물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다.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다.”라고 하였다. 조대복은 작은 보트에서 만나고 함선에도 올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 대화를 하고자 하였으나 한문을 몰랐고, 언문도 몰라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유럽의 선박이 동아시아에 항해를 할 때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이 함께 탑승하였으나, 당시 영국 함선에는 중국인이 없었던 것이다.

[말로 대화가 통하지 않은 만남]

조선인과 영국인이 기록한 각자의 시선은 당시 조선인의 모습과 영국인의 모습을 더 생생하게 알려 준다. 조선인과 영국인은 우연히 접촉하면서 대화를 시도하였으나 불가능하여 말이 아닌 눈으로 본 상대를 기록하였다. 생김새, 복장, 행동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특히 바실 홀의 기록이 매우 상세하다. 아마 대화 상대였던 마량첨사 조대복의 모습을 묘사하였을 것이다. 관리들의 모습, 조선 선박의 모습, 조선의 음악, 백성들의 생김새, 그리고 본래 목적이었던 조선의 서해안 정보가 담겨 있었다.

마량첨사 조대복이 서양인들을 상대한 이유는 명확하였다. 자신이 관리하는 구역에서 이양선이 나타날 경우 서양인들이 왜 조선에 도착하였는가를 조사하는 임무가 있었다. 조사를 위하여서는 대화를 하여야 하는데 당연히 조선의 말과 언어를 알 리가 없다. 영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인들이 “당신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라고 말을 하여도 그런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였다. 소통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조대복 또한 영국인들이 왜 조선에 도착하였는지 알아내지 못하였다. 바실 홀의 기록에 따르면 영국인들은 조선인 관리들에게 양주를 대접하였다고 한다. 이때 건넨 양주가 브랜디와 럼주였다. 영국인들은 술을 마시고 분위기가 좋아지자 식사 대접을 하였다. 조대복은 영국식 식기를 이용하여 식사를 하였다. 바실 홀은 조대복이 영국의 식문화를 따르려고 하는 태도에 대하여 사려 깊은 배려와 정중한 태도를 높이 샀다고 기록하였다. 바실 홀의 기록을 살펴보자.

“노인[마량첨사 조대복]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습관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정중하고 넉넉한 마음씨를 가졌고, 이는 정말로 감탄할 만하였다. 그리고 그가 여태까지 우리들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을 생각하면 그의 예의바름은 그 사회에서 차지하는 그의 높은 지위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환경에 의하여 굳어지지 않은 그 사회의 문명의 척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도 하여 아무튼 나라가 다르고 사회가 다르더라도 정중함의 형태는 모두 아주 닮아 있다고 하는 우연성은 매우 기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늙은 수장[조대복]의 세련된 성격은 우리들의 호의를 배우려고 노력할 때는 기쁨을 나타내고, 무엇이든 우리가 마음 쓰는 것에 대하여서는 관심을 표하는 것에서 아주 잘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는 호기심이 풍부하여 처음에 용도를 몰라 어리둥절하던 도구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을 때는 매우 기뻐하였다.”

바실 홀은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모습을 조선 이외의 곳에서 보지 못하였던 것 같다. 즉 조선 문화의 수준을 매우 높이 평가한 것이다. 조선인과 영국인들은 곧 친하여졌고 조대복은 배 안에 있던 망원경, 나침판, 대포 등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배 안에 가득한 서적에도 관심을 가졌다. 선실 한쪽에는 서재가 있었고 책이 가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충청수사의 보고 내용 중에 영국인이 책을 전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영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무슨 책인지 전혀 몰랐다. 보고 내용에서도 언문도 아니고 한문도 아니면서 초서체 같은 책이라고만 표현하였다. 그러나 바실 홀은 매우 명확하게 책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마량첨사 조대복이 선물받은 책은 성경이었다.

[우연히 받은 최초의 성경]

1816년 7월 19일, 충청수사 이재홍의 장계가 중앙 정부에 도착하였다. 마량첨사 조대복의 조사 내용을 정리하여 보고한 것이었다. 장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당시 받은 책은 모두 세 권이었다. 한 권은 조대복이 대접을 받고 배에서 내릴 때 받은 것이고, 두 권은 함선에 타기 전에 보트에서 받았던 책이었다. 그러나 책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기록이 없었다. 어떤 책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정황은 다음의 보고 내용에 보인다.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젓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주려고 하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한문으로 종이에 적어 보았으나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언문으로 써서 적어 보았으나 손을 저으며 모른다고 하였다. 영국인들도 글씨를 써서 보여 주었으나 이번에는 조선인들이 몰랐다. 그러자 영국인들이 서책 가운데 책을 두 권 꺼내 한 권은 마량첨사에게 다른 한 권은 비인현감에게 주었다. 책이 영어였기 때문에 사양하고 안 받으려고 하였으나 영국인들이 받지 않아서 마량첨사 조대복은 결국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왔다. 조대복은 단지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문자’라고만 썼다. 영어로 쓴 책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내용은 몰랐다. 다행이 바실 홀이 남긴 기록을 통하여 성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받은 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성경으로 여겨진다. 결국 마량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은 성경의 전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해프닝에 불과할 수 있으나 조선인과 영국인이 남긴 기록을 통하여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조명되었다. 영국인이 성경을 건넨 의도와 배경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동양과 서양이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였다는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성경이 전래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의 존재가 서양에 알려지고 19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에 선교사가 파견되고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한국의 역사와 한국 교회사에서 기억할 만한 역사적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량진 포구에 한국최초성경전래지기념관이 건립되어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공간임을 되새기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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