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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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庇仁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에 있었던 조선 시대 지방 행정 구역.
[개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조선 시대 지방 행정 구역은 부, 목, 군, 현이 있었다. 부에는 종2품 부윤, 정3품 대도호부사, 종3품 도호부사가 파견되었고, 목에는 정3품 목사, 군에는 종4품 군수, 현에는 종5품 현령과 종6품 현감이 파견되었다. 당시 비인 지역에는 종6품 비인현감이 파견되었으며, 조선 전기에는 종9품 훈도 1인이 배치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현감만 남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비인 지역은 백제 시대 비상현(比象縣)이 있었고, 통일 신라 시대에는 명칭을 비인으로 고쳐서 서림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시대 현종 연간에는 가림현에 속하였다가 이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 현감이 파견되었다. 조선 시대 비인현은 충청도 연해에 있어서 해상 교통과 군사 방위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세곡선이 비인현 앞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효종 연간에는 마량진을 두어 수군첨절제사를 주둔하도록 하였다. 영조 연간에는 제민창을 두어 쌀 3만 석을 비치하였다.
[관련 기록]
조선 시대 당시 비인현은 조선 전기 문인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이 남긴 「비인팔경(庇仁八景)」에 잘 드러나 있다. ‘아득한 큰 바다, 보일락 말락 한 작은 섬들, 겹겹의 신기루, 산봉우리의 빼어난 모습, 둔영의 수고, 연포의 돌아가는 돛배, 송평의 가을 달, 관사의 저녁 종소리’ 등 8가지 빼어난 경치를 시문으로 그렸다. 「비인팔경」은 비인현과 관련된 풍경을 통하여 비인의 교통 및 군사적 입지를 묘사하였다.
[내용]
조선 전기 비인 지역의 사회 경제적 위상은 한산군 및 서천군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기재된 호수와 인구를 보면, 비인현은 한산군과 서천군에 비하여 절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 비인 지역의 삶의 조건은 많이 나아졌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호구총수(戶口總數)』를 보면, 비인현의 인구는 1만~1만 1000명인데, 한산군은 약 1만 1000명, 서천군은 1만 1000~1만 3000명에 불과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상대적으로 비인현에 많은 인구가 거주하게 된 셈이다.
[변천]
비인현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은 제민창의 설치이다. 제민창은 진휼을 위한 창고였으며, 『비인현읍지(庇仁縣邑誌)』에 기재된 「제민창 중건기」에 따르면, 비인현 백성들의 구휼을 위한 목적이라기보다는 충청도 전체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진휼 창고였다. 충청도 연해 지역과 금강을 통한 내륙 지역까지 모두 진휼을 할 수 있는 비인현의 지리적 입지 조건이 매우 중요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비인현은 지금의 서천군 지역 내에서도 작은 고을에 속하였으나 지리적 입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비인현에 설치된 제민창, 마량진 부근의 표류민(漂流民) 등은 비인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