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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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異樣船 漂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 나타난 외국 선박의 표류.
[개설]
이양선(異樣船)은 조선 후기 바닷가에 등장한 서양 및 일본 배를 가리킨다. 우리나라 배와 다른 형태를 가진 모든 배를 이양선이라고 지칭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이양선이 많이 등장하였다. 대항해 시대 이후 18세기 유럽의 열강 등에서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점차 동아시아로 세력을 진출하였다. 서양 열강들은 동아시아로 선박을 끌고 와서 통상을 요구하거나 지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영조 대부터 보이기 시작한 이양선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전반 이후 급증하였다. 고종 대에만 해도 100여 건이 넘는 이양선 기록이 확인된다. 대부분의 이양선은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통상을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양선이 자주 출몰하자 정부에서는 이양선들에 위기감을 느꼈고, 청나라에서 서양과의 전쟁 소식이 전하여지면서 점차 해양을 방어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경과]
1794년(정조 18) 마량진 앞바다에 청나라 등주 황현 출신 사람의 배가 나타났다.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 처음으로 표류한 이양선이었다. 충청감사의 장계로 이양선이 나타난 것이 보고되었고, 서울에서 역관이 파견되어 이양선을 다시 청나라로 돌려보냈다. 표류하는 이양선이 자주 출몰하자 충청수영에 역관을 두자는 논의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주로 청나라 사람이 표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중국어 역관을 보내려는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 사정이 달라져 유럽 선박이 등장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816년 영국 함선 알세스트호와 리라호의 등장이다. 영국 함선은 해도를 작성하기 위하여 마량진에 정박하였고 이때 우연히 성경이 전달되기도 하였다. 1819년 일본 규슈 남단에 있는 쓰시마번의 무사 야스다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여 마량진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야스다 일행은 비인현감의 조사를 마치고 약 한 달 뒤 귀환하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결과]
19세기의 다른 이양선 표류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18년(순조 18) 마량진과 남포 사이의 황죽도에 청나라 상인 12인이 표류하였고 의복과 식량을 지원하였다. 1843년(헌종 9) 비인현 내도둔에 표류한 국적 불명의 무인선이 등장하였다. 1879년(고종 16) 비인현 내다포에 청나라 선박이 표류하였는데 표류 인원은 7명이었다. 식량과 의복을 지원하고 선박을 수리하기도 하였다. 1880년(고종 17) 도둔포와 마량진에 청나라 사람과 태국 사람이 표류하였다. 당시 청나라 사람은 9명, 태국 사람은 18명이었다. 의복과 식량을 지원하였다. 1882년(고종 19) 마량진 앞바다에 청나라와 네덜란드 선박이 표류하였다. 청나라 사람은 15명, 네덜란드 사람은 1명이었다. 선박과 식량을 지원하여 보냈다.
[의의와 평가]
이양선의 보고와 대처는 비인현감과 마량첨사가 담당하는 업무 중 하나로 조선 정부의 정책에 따라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서는 인도적인 조치로 대하여 주었다. 이양선 표류는 서천 지역에서 타국 사람들과 만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