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여명과 종말, 서천 봉선리 유적과 건지산성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001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기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서천 봉선리 유적 -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봉선리 581지도보기 일원
현 소재지 서천 건지산성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길 122[호암리 산4-2]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봉선리에 있는 백제 시대 유적과 한산면 지현리에 있는 이중 구조의 복합식 산성.

[개설]

서천 봉선리 유적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봉선리의 낮은 구릉성 산지에 있으며, 청동기 시대 생활 유적, 고대 백제의 생활 유적·분묘 유적·제사 유적, 조선 시대 생활 유적·분묘 유적 등이 중복 확인된 대규모 복합 유적이다. 청동기 시대에 처음 마을이 형성되었고, 원삼국 시대에 유력자들의 무덤이 자리 잡았으며,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지방 세력 묘역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서쪽 구릉 정상부 일대에 있는 제사 관련 유적은 5세기 후반 백제 한성기 말 또는 웅진기 초에 조성되어 7세기 사비기까지 계속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가 매우 커서 백제의 왕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 지낸 천제단(天祭壇)이라는 견해, 원래 지방에서 하늘에 제사[天祭]를 지내던 곳이었다가 백제 중앙의 사전(祀典) 체제에 편입된 뒤 산신(山神) 제단으로 바뀌었다는 견해, 바닷길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던 제사 시설이라는 견해 등 해석이 다양하다.

서천 건지산성지현리건지산에 있는 이중 구조의 복합식 산성으로, 금강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며 부근 일대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와 규모이다. 7세기 후반 백제 부흥 운동군의 중심지인 주류성이었다는 학설이 있으며, 이와 달리 고려 시대에 쌓은 산성이라는 고고학적 견해도 있다. 축성 연대를 떠나서 서천 건지산성금강 수로와 부근 평야 및 교통로의 주요 관문이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두 유적은 금강의 관문에 해당하던 서천 지역의 유력 세력 형성 및 백제 멸망기의 금강 수로 통제와 관련한 유적으로 서천 지역의 인문 지리적 중요성을 상징한다.

[금강 하류를 무대로 성장한 세력, 서천 봉선리 유적]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봉선리는 동쪽 양화면을 지나는 금강 본류로부터 직선 거리 약 9㎞ 떨어진 곳이고, 남쪽 화양면을 지나는 금강 본류로부터도 직선 거리 약 9㎞에 해당한다. 서쪽 종천면의 해안으로부터는 약 12㎞ 떨어져 있다. 백제 사비기의 왕성이었던 부여의 부소산성은 봉선리의 동북쪽 약 20㎞ 거리에 있다. 백제가 538년 봄에 웅진(熊津)[현재의 공주시]에서 사비(泗沘)[현재의 부여군]로 도읍을 옮긴 이유를 흔히 드넓은 강변 평야의 농업 생산력과 수운 등의 교통에 유리한 지리적 이점 때문이라고 지적하는데, 그런 점에서 봉선리는 사비 왕도 외곽, 금강 하구 방향의 중요 지역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시기가 빠른 유적은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집자리와 무덤이었다. 집자리[住居址] 25기, 원형 구덩이[竪穴] 7기, 돌널무덤[石棺墓] 13기 등이 발견되었는데, 구릉 정상부의 평탄지에 있는 집자리는 대개 원형으로 부여 송국리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과 비슷하였으며, 집자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른 능선에 밀집 분포한 돌널무덤은 돌널 크기가 대개 길이 55~150㎝ 안팎으로 작은 편이었다. 집자리에서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조각, 그리고 돌화살촉[石鏃], 돌칼[石劍], 돌도끼[石斧], 돌끌[石鑿], 홈자귀[有溝石斧], 간돌검[磨製石劍] 등의 석기류가 출토되었고, 돌널무덤에서는 5호 무덤에서 돌화살촉, 12호 무덤에서 돌칼[石劍]이 1점씩 수습되었을 뿐 유물이 거의 없었다. 유적의 규모와 출토 유물의 종류 및 내용을 감안하면 독립적인 세력이 아니라 어딘가에 딸린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철기 시대에 해당하는 원삼국 시기 주거지도 발견되었다. 모두 10기였는데, 대개 경사면에 있어서 유실된 경우가 많았으며, 평면 형태는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주거지 안에서는 기둥 구멍[柱孔], 화덕 자리[爐址], 벽도랑[壁溝], 타원형 구덩이 등이 발견되었다. 주거지 부근에서는 무덤 주위에 도랑을 파서 돌린 주구묘(周溝墓) 12기가 확인되었다. 이 지역이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기 전 마한 문화의 일부였음을 나타낸다.

서천 지역이 백제 영역으로 편입된 것은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백제 시대 마을은 야산의 높이 40~60m 능선 및 경사면에 있었던 듯하다. 능선 전체를 조사하지 않아서 주거지의 전체적인 배치 상태나 분포 상황을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주거지 39기 이상, 저장 구덩이 93기 이상을 확인하였다. 주거지 평면 형태는 방형 또는 장방형에 가깝고, 크기는 대개 길이 4~8m 정도이다. 주거지 안에서는 화덕 자리, 벽도랑 시설, 기둥 구멍, 출입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부뚜막 시설과 구등[고래] 시설, 연통부 등이 확인된 주거지도 있다. 주거지 주변에 1~2기의 저장 구덩이를 덧붙여 만들거나 독립적으로 저장 구덩이 4~5기를 군집시킨 모습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장 구덩이 바닥에서 콩, 벼, 조 등의 탄화 곡물이 많이 발견된 사례도 있었는데, 목탄과 탄화 곡물을 묶어서 방사성 탄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 기원후 약 2~6세기로 분석되었다.

백제 시대 지상 건물터 7기도 발견되었다. 초석건물터와 적심건물터였는데, 적심건물터 2동은 평면 방형에 장축 길이가 6~9m이며, 1호 건물터의 경우에는 아궁이와 고래 시설이 있었다. 초석건물터는 모두 4기가 발견되었는데, 도성 외의 지역에 있으면서 형태가 다양하여 학계가 주목하였다. 크기는 대체로 가로 10~16m, 세로 6~9m 정도이며, 3×1칸 건물터에서 10×3칸 건물터까지 다양하다. 건물터는 구릉의 경사면을 ‘L’자형으로 판 뒤 평탄지를 조성하였고 적심토와 주춧돌을 배치하였다. 또한, 일부 소형 석재들을 이용한 고맥이 시설이 확인되었으며, 내부 시설은 배수 시설, 연도부, 고래 시설 등이 있었다. 초석건물터에서 추출한 목탄 시료를 통하여 방사성 탄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 1호 초석건물터는 600~660년, 2호 초석건물터는 560~660년, 4호 초석건물터는 530~650년으로 추정되었다.

백제 주거지 및 건물터와 관련한 무덤은 분구묘(墳丘墓) 12기, 움무덤[土壙墓] 90기, 구덩식 돌널무덤[石槨墓] 61기, 굴식 돌방무덤[石室墓] 7기 등 종류가 다양하다. 분구묘는 대부분 구릉 정상부에 분포하며, 무덤 주위의 도랑[周溝]은 대체로 방형이고, 매장 주체부는 나무널[木棺]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은 대개 토기와 철기인데, 토기류는 바닥이 둥근 것[圓底]이거나 편평한[平底] 짧은목항아리[短頸壺]가 매우 많고, 철기류는 둥근고리칼[環頭刀], 쇠창[鐵鉾], 쇠창고달이[鐵鐏], 쇠도끼[鐵斧], 쇠낫[鐵鎌] 등의 무기와 농공구였다. 움무덤은 조사 범위 전역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었는데, 원삼국 시대부터 백제 시대 고분이 함께 분포한다. 그리고 구덩식의 돌널무덤과 굴식의 돌방무덤은 함께 섞여서 분포하는데, 구덩식 돌널무덤은 무덤의 긴 벽이 등고선과 평행한 것이 많으며, 출토 유물은 곧은입짧은목항아리[直口短頸壺], 넓은입진목항아리[廣口長頸壺], 병모양토기[甁形土器], 세발토기[三足器] 등의 토기류, 세잎둥근고리큰칼[三葉環頭大刀], 쇠창[鐵鉾], 쇠도끼 등의 무기류, 그리고 금동 귀걸이[耳飾]와 굽은옥[曲玉], 구슬 등의 꾸미개가 출토되어 높은 위계를 보인다. 굴식 돌방무덤은 양벽 조임에 무덤안길[羨道]이 널방의 오른쪽으로 치우친[右偏在] 점이 특징이다. 출토 유물은 항아리모양토기[壺形土器], 병모양토기, 뚜껑 접시[蓋杯], 횡병(橫甁) 등이 있다. 유물의 편년에 기초할 때 돌널무덤과 돌방무덤은 5세기 대를 전후하여 백제 한성기 말부터 웅진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하며, 서천 지역 토착 세력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현재까지 서천 봉선리 유적에서 발견된 백제 주거지는 4세기 중엽에서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이고, 백제 무덤은 대체로 5세기부터 6세기 초반에 조영된 것이어서 서로 약간의 시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조사 범위가 일부 제한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현재 봉선리 지역에는 한성기부터 사비기까지 꾸준히 백제의 중앙 세력과 연계한 사람들이 거주하였으며, 특히 백제가 도읍을 금강 유역으로 옮긴 뒤에는 상당한 권력자들이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서천 봉선리 유적은 청동기 시대부터 마한의 소국을 거쳐 백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마을을 이루고 무덤을 만들었으며, 이후로도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생활 시설과 무덤이 모두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2006년 11월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생활 유적과 분묘 유적으로 구성된 복합 유적으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고속도로에 편입되지 않은 서쪽 구릉 일대 25만 6924㎡ 구역을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국가적 제의 시설인가? 풍정리산성]

시초면의 가장 동쪽에 있는 봉선리와 서쪽의 풍정리가 경계를 이루는 얕은 산[높이 약 95m]에는 풍정리산성으로 불리는 테뫼식 토성이 있어서 사비 도성 외곽의 작은 방어망 중 하나로 추정하였다. 성벽 둘레는 약 520m 정도였으며, 성벽 너비는 7~8m이고 성벽 안쪽에는 흔히 회곽도라고 부르는 폭 10m 정도의 보행로가 있었다. 풍정리산성서천공주고속도로 건설 구간에 포함되었으므로 2003년부터 일부 지점을 발굴 조사하였는데, 성 안팎에서 특별한 시설들이 발견되었다. 2016년 발굴 조사를 통하여 풍정리산성 성벽으로 추정한 낮은 흙벽과 동쪽 정상부에 3단으로 조성한 원형의 단(壇) 시설, 목곽고(木槨庫), 주거지, 건물터, 구덩이 등은 모두 제사 의례와 관련한 유구였는데, 특히 가로 500㎝, 세로 470㎝, 잔존 깊이 340㎝ 크기의 목곽고 안에서 소·멧돼지·사슴 등의 동물뼈와 복숭아·박·밤 등의 씨앗 및 열매가 세발토기·굽다리접시[高杯]·그릇받침[器臺] 등의 토기류와 함께 발견되어 학계의 이목을 끌었다. 목곽고는 집수 시설로 의례적인 성격을 띠었을 것으로 흔히 추정한다. 이 시설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한성기 말 또는 웅진기 초이고, 사비기까지 사용한 것으로 해석한다. 바로 인근에는 같은 시기에 조성된 서천 봉선리 유적이 분포하므로 무덤과 관련한 상장 의례(喪葬 儀禮) 유적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공주의 정지산 유적과 수촌리 유적, 송산리 왕릉원의 적석 유구 등 백제의 무덤 관련 제의 시설들과 비교할 때 봉선리 제의 유구의 규모가 매우 크다는 점에 주목하여 백제의 천제단(天祭壇)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천제단이었다면 제사를 지낸 사람은 왕이며, 그런 점에서 동성왕이 봉선리 지역으로 사냥하러 왔다가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 원래 지방에서 하늘에 제사[天祭]를 지내던 곳이었다가 백제 중앙의 사전(祀典) 체제에 편입되어 산신(山神)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졌던 제단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봉선리 지역이 바닷길 근처이며 목곽고와 수혈 유구 안에서 다양한 종류의 패각류가 발견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바닷길의 안전한 항해를 위한 제사 시설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봉선리 제사 유적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아직 밝혀진 바 없으나, 서천 지역은 통일 신라 시대에도 중요한 제사처였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국가 제사를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중사에는 5악(五岳)·4진(四鎭)·4해(四海)·4독(四瀆)을 포함시켰는데, 4독에 해당하는 제사지는 동쪽 토지하(吐只河), 남쪽 황산하(黃山河), 서쪽 웅천하(熊川河), 북쪽 한산하(漢山河)였다. 그리고 보은의 속리악(俗離岳), 고령의 추심(推心), 서림[서천]의 상조음거서(上助音居西), 결기군[결성]의 오서악(烏西岳), 대성군의 북형산(北兄山), 완도의 청해진(淸海鎭) 등의 제사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서림[서천]의 상조음거서는 현재의 장항 일대에 비정하며, 서해와 금강을 오가는 배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서천 봉선리 유적과의 직선 거리는 대략 10㎞ 남짓이다. 백제의 봉선리 제의 시설 운영과 통일 신라의 서림[서천] 상조음거서 제사지 운영은 금강 하구에 있는 서천 지역이 수로(水路)·해로(海路)와 같은 교통로를 중심으로 국가의 안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상징한다.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 서천 건지산성]

서천 건지산성(乾芝山城)[사적]은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있는 건지산[높이 약 170m] 정상부와 가지 능선 및 계곡을 감싸고 있다. 서천 봉선리 유적의 동남쪽 5.7㎞ 거리에 있으며 국가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한 관방 유적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건지(巾之)’로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건지(乾至)’로 한자가 다르게 적혀 있다. 성벽은 이중 구조의 복합식으로 건지산 정상부를 에워싼 둘레 약 350m의 말안장 모양 테뫼식 토축 내성과 서북쪽 경사면의 계곡까지 포함하는 둘레 1,384m의 포곡식 외곽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천 건지산성 동남쪽으로는 건지산 자락이 뻗어 나가 나지막한 구릉지를 형성하였으며, 주변으로 멀리 북쪽에서 남쪽의 금강을 향하여 흘러 내려오는 작은 하천들이 넓은 충적 대지를 만들어 놓아서 마을을 이루고 살기 좋은 환경이다. 서천 건지산성에서 남쪽으로는 금강까지 약 4.4㎞, 동쪽으로는 금강까지 약 6.4㎞ 정도이다. 건지산에서는 금강이 부여 방면에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꺾어진 뒤 바다로 들러가는 모습을 다 굽어볼 수 있어 부근 일대의 진산(鎭山)임을 알 수 있다.

1872년에 편찬된 『충청도읍지』에는 백제 설림군 치소가 천방산 남쪽의 문장면[현재의 문산면 와촌]에 있었고, 한산군[현] 치소는 건지산 아래 지현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한산이씨세보』에는 시조인 이윤경의 무덤이 옛 읍의 오른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한산 지역 지리에 대입하면 옛 읍은 건지산 남쪽, 지현리삼층석탑의 서쪽 지역에 해당하여, 서천 건지산성을 배후 산성으로 읍을 배치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서천 지역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대의 진입로였다. 660년 봄 3월에 신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라는 당나라 고종의 명령을 받은 소정방(蘇定方)은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6월 21일 덕물도(德物島)[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신라 태자 김법민(金法敏)을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7월 10일 백제 사비 도성 남쪽에서 신라군과 합세한 뒤 백제를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서해에서 배를 타고 사비 도성 남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현재의 서천 앞바다와 금강한산면 일대를 지나야 한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660년 7월 의자왕이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9월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들과 주요 대신 및 백성 1만 2800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갔지만, 백제에 남은 사람들은 백제 부흥 운동을 벌여 661년 2월에는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는 사비성을 백제 부흥군이 포위할 정도로 기세를 올렸다. 661년 9월 백제 부흥군은 왜에 가 있던 백제왕자 부여풍(扶餘豐)[풍장(豊璋)]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였는데, 부여풍은 주류성(周留城)에 거주하며 부흥군을 이끌었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하여서는 홍성 학성산성, 서천 건지산성, 세종 당산성, 부안 위금암산성 등 여러 학설이 제기되었는데, 현재 부안 위금암산성설이 유력하지만, 서천 건지산성 일대로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그중 주류성이 서천 지역에 있었다는 설은 ① 임존성을 비롯한 금강 북쪽의 백제 부흥군 세력과 연계하기 좋은 점, ② 663년 8월 나당연합군이 총공세를 펼칠 때 백제 부흥군이 장악한 부여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므로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아예 본거지인 주류성을 공격하자고 논의하였으니 가림성과 주류성의 지리적 연계성이 높은 점, ③ 주류성은 김제의 피성(避城) 및 논산의 덕안성(德安城)보다 북쪽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은 점 등을 제기하며 한산면 서천 건지산성화양면 서천 추동리 유적에 주목하고 있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663년 8월 중순에 신라군 중심의 나당 연합군이 주류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며, 8월 27일부터는 백강(白江)[금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 170척과 왜의 수군 1,000척이 맞붙어 싸우는 큰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기계가 우세한 당 수군이 크게 이겨 왜군의 배 400척이 불타고 많은 군사가 물에 빠져 죽었다. 왜의 수군을 맞이하기 위하여 백강 어귀로 군대를 이끌고 나왔던 부여풍은 전투가 크게 불리하여지자 측근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갔으며, 9월 7일 주류성도 함락되었다고 한다. 이에 금강 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서천 건지산성을 백제 부흥군의 중심지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예전 중학교 교과서에서 서천 건지산성을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의 중심지인 주류성이었다고 소개한 적이 있으며, 현재도 서천 건지산성 정상부 표지판에는 ‘주류성’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1999년 충청매장문화재연구원이 동벽·서벽 일부 및 동문지, 수문지 등을 발굴 조사한 뒤 포곡식 산성은 고려 시대인 12세기 이후 축성한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논란이 일었다.

1999년 발굴 조사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기와류와 자기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동문지와 수구지는 조사 전에 이미 훼손되어 흔적이 분명하지 않았지만, 동문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건물터 1동이 확인되었다. 동쪽 성벽은 생토면인 황갈색 사질토를 약 19°의 경사도로 완만하게 파낸 뒤 작은 깬돌과 사질 점질토를 교대로 쌓은 토석 혼축이었다. 흙 속에 청자편과 기와편들이 섞여 있기도 하였는데, 기와는 모두 생선뼈무늬의 암키와였다. 성벽 바깥쪽과 안쪽에는 각각 외호(外壕)와 내호(內壕)가 있었다. 외호의 너비는 상부 220㎝, 하부 120㎝이고, 잔존 깊이는 약 60㎝였다. 내호는 북쪽 성벽에서만 일부 흔적이 확인된다. 서쪽 성벽도 10~20㎝의 크기의 깬돌을 명갈색 사질토와 함께 쌓았는데, 동쪽 성벽만큼 정형성이 없고 성체 중앙부에만 깬돌을 집중하는 방식이었다. 서쪽 성벽에서는 생선뼈무늬, 복합문 등의 기와편만 출토되었다.

건물터는 산성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의 북쪽에서 조사하였다. 오랫동안 경작지로 사용한 곳이므로 교란과 훼손이 심하여 건물의 평면 구조와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며, 단지 동쪽 성벽 가까운 지점에서 2줄의 기단 석렬과 주춧돌 1매만 확인하였다. 기단 석렬은 남북을 장축으로 뻗어 있었는데, 30~50㎝ 크기의 깬돌로 조성하였으며, 2줄 중 서쪽 석렬은 현재 296㎝ 정도 남아 있고 동쪽 석렬은 130㎝ 정도만 남아 있다. 기단석 아래에는 10~15㎝ 크기의 기단 보강석이 약 30㎝ 두께로 바닥면에 깔려 있었다. 주춧돌은 깬돌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평면 부정형이며 지름은 약 80㎝이다. 이와 비슷한 크기의 돌들이 건물터 안에서 더러 발견되어 주춧돌 흔적으로 추정되지만 모두 제자리를 벗어난 것이어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건물터에서는 기와, 분청사기, 백자, 토기, 동전[상평통보] 등이 출토되었다.

서천 건지산성을 발굴 조사한 충청문화재연구원은 성벽에서 출토된 기와와 청자를 근거로 12세기 이후에 성벽을 쌓았으며 조선 중종 때인 16세기 초에 산성을 폐기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중종 때 한산읍성을 쌓으면서 기능을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이 맞다면 서천 건지산성은 백제 때의 주류성일 수 없다.

그러나 발굴 조사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어서 서천 건지산성의 축성 연대를 단정할 수 없으며 조사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더불어 서천 건지산성 주변 일대까지 포함시켜 조사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서천이 금강의 초입 부분이라는 점, 부흥 운동의 중심 활동지가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이라는 점, 그리고 서천 건지산성 정상부에서 익산과 부여 가림성의 조망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서천 건지산성 일대는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로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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