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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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學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민영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 6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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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9일 - 임학규 신장리 장터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4일 - 임학규 「보안법」 위반으로 1년 형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74년 7월 1일![]() |
추모 시기/일시 | 1983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출생지 | 임학규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
활동지 | 신장리 장터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임학규(林學圭)[1897~1974]는 1897년 6월 23일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자, 임학규는 송여직·송기면·이근호·유성열 등과 협의하여 신장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장날인 3월 29일 송기면 등 주도 인물들과 함께 신장리 장터로 나와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면서 만세 시위에 돌입하였다. 시위를 해산하기 위하여 출동한 경찰이 송기면·유성열 등 주도자를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경찰의 탄압에 분노한 군중의 참가로 시위대의 규모는 2,000명에 이르렀다. 주재소로 몰려간 시위대는 연행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를 향하여 돌을 던져 창문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 책상과 의자 등 기물을 파손하고 경찰들을 구타하였다. 결국 주재소는 파괴되었고, 송기면·유성열 등 감금되어 있던 인사들은 모두 구출되었다.
임학규는 1919년 4월 14일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고하였으나 1919년 5월 19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1919년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임학규는 1974년 7월 1일 사망하였다.
[묘소]
임학규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임학규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