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731
한자 朴在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송산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 6월 14일연표보기 - 박재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박재엽 신장리 장터 시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9일 - 박재엽 「보안법」 위반으로 3년 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42년 7월 1일연표보기 - 박재엽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박재엽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박재엽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박재엽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송산리지도보기
활동지 신장리 장터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지도보기
묘소 박재엽 묘소 - 충청남도 서천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재엽(朴在燁)[1894~1942]은 1894년 6월 14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9년 서울에서 시작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자, 박재엽은 3월 중순경 이근호·임학규·유성열 등과 협의하여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신장리 장날인 3월 29일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 박재엽 등은 신장리 장터로 나와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면서 만세 시위에 돌입하였다. 곧이어 출동한 경찰이 송기면·유성열 등 주도자들을 체포하여 연행하였다. 경찰의 탄압에 분노한 군중의 참가로 시위대의 규모는 2,000명에 이르렀다.

박재엽은 순사 주재소로 몰려간 시위대와 함께 연행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하였고, 이동홍·고시상·양재흥·정일창·김인두 등과 함께 구금된 인사들을 석방하기 위하여 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하여 돌을 던져 창문을 깨어 주재소로 들어가 책상과 의자 등 기물을 파손하고 경찰을 구타하였다. 이에 송기면·유성열 등 감금되어 있던 인사들을 모두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송기면 등과 함께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한산면을 거쳐 서천면 방면으로 행진하다가 서천군수 권익채(權益采)의 권유로 자진 해산하였다.

박재엽은 1919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2년 7월 1일 사망하였다.

[묘소]

박재엽의 묘소는 충청남도 서천군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재엽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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