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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715
한자 高時相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태성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민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7월 8일연표보기 - 고시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 - 고시상 신장리 장터 만세 시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9일 - 고시상 「보안법」 위반으로 5년 형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19년 7월 26일 - 고시상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6개월로 감형
몰년 시기/일시 1963년 2월 27일연표보기 - 고시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고시상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고시상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고시상 출생지 -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태성리지도보기
활동지 신장리 장터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고시상(高時相)[1881~1963]은 1881년 7월 8일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태성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송여직·송기면 형제 등의 주도하에 1919년 3월 29일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고시상은 “우리 한국이 자주독립하여 자유를 향유하고 장래의 안락을 도모한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는 송여직의 연설에 크게 고무되어 만세 시위 대열에 참여하였다. 이에 주민들과 함께 신장리 일대를 행진하며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신장리 장터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시위 탄압을 위하여 마산면주재소의 경찰이 즉시 출동하였다. 시위대 해산에 투입된 경찰들은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던 송기면 등 주동자 등 4명을 연행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격분하여 더욱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고, 주재소로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거세게 요구하였다. 일제 경찰이 시위대의 요구를 묵살하는 태도에 분노하여 고시상은 이동홍·양재흥·박재엽 등과 함께 연행 동지들을 석방하기 위하여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안으로 들어가 경찰을 구타하고 창문과 책상, 의자 등 시설과 집기류를 파괴하였다. 주재소는 파괴되었고, 송기면·송여직 등 연행자들을 모두 구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순사보 이한규가 총을 쏘아 이동홍과 양재흥 등이 다치자, 이한규를 향하여 “네가 발포하였다.”, “죽이겠다.”라고 외치며 달려들어 구타하였다. 고시상은 이후 시위대가 한산면을 거쳐 서천면 방면으로 행진할 때 선두에 섰다. 마산면한산면 경계를 통과할 즈음 서천군수 권익채(權益采)의 권유에 따라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고시상은 일제 경찰에 피체된 뒤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919년 5월 19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여 1919년 7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63년 2월 27일 사망하였다.

[묘소]

고시상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시상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 「고등법원 형사부 판결문」(1919. 10. 9.)
  •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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