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30
한자 東學農民革命
이칭/별칭 동학농민전쟁,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헌주

[정의]

1894년 충청남도 서천 지역을 비롯한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일으킨 농민 봉기.

[개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은 1894년(고종 31)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 운동으로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1860년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의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한 동학은 봉건적 수탈 구조에 시달리던 농민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었으며 최제우의 사형 집행 이후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교단을 정비하면서 교세가 오히려 확장되었다. 확장된 교단 세력을 바탕으로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고, 교조 신원 운동이 무위로 돌아가자 1894년 3월 급진적인 남접 세력을 중심으로 1차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전라도 일대를 장악한 동학 세력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가 9월 2차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런 움직임은 충청남도 서천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1차 봉기 때는 서천 지역에서 움직임이 없었지만 2차 봉기 때는 서천 지역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이 있었다. 다만 서천 지역의 농민군 전투는 대체로 호남의 남접 농민군이 북진하거나 공주 전투에서부터 후퇴하면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배경]

서천 지역에 동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농민 봉기가 일어난 1894년 7월 이전에 이미 동학이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세도가에 선산을 빼앗긴 조동석(趙東碩)의 아들 조영구((趙英九)가 1894년 7월 서천 지역을 총괄하는 도집강(都執綱)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도 추용성(秋鏞聲), 김약선(金若善), 최재홍(崔載洪) 등이 비슷한 시기에 접주로 활약하였다. 아울러 최덕기(崔德基)의 『갑오기사(甲午記事)』에서는 서천 일대에 많은 동학도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서천 지역의 특성상 충청북도 보은(報恩) 지역에 있던 북접 교단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당시 북접 교단은 1차 농민 봉기를 찬성하지 않아 서천 지역에서는 1차 봉기 때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전개과정]

1차 농민 봉기 이후에도 서천 지역을 포함하여 충청도에서는 동학 북접 교단의 지침에 따라 농민 봉기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나라군의 출병을 틈타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고 곧바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키자 북접 교단의 정세 인식도 달라졌다. 최시형은 수하 간부들의 설득에 못 이겨 결국 봉기를 허락하고 9월 18일 봉기령을 내렸고 서천 지역에서도 농민들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1894년 6월부터 서천 일대에 동학도들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8월 중순이 되면서 동학군 수천 명이 금강 인근에 집결한 후 감영으로 가려 한다는 기록이 있다. 아울러 1894년 11월 5일경에는 동학농민군이 한산 상지포(上之浦)를 출발하여 서천 건지산성 점령을 위하여 관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1월 19일 서천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호남 지역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한산읍과 서천 지역을 함락하였다. 하지만 11월 21일 추가로 파병된 경군(京軍)이 동학농민군 부대를 공격하면서 다시 동학농민군은 수세에 몰렸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경군에게 패하였고 서천읍성은 경군이 차지하였다. 하지만 동학농민군 잔여 세력이 반격하여 12월 3일경에는 한산읍성을 함락한 후 다시 물러났다.

[결과와 영향]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조선 왕조의 내재적 모순과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다는 명분을 가진 싸움으로 서천 지역 사람들도 적극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현재적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