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산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11
한자 吉山浦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삼산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 길산노동조합 총회 개최
폐지 시기/일시 1990년 - 금강하굿둑 건설로 길산포 포구 기능 상실
관할 지역 길산포 -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삼산리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삼산리에 있었던 포구.

[제정 경위 및 목적]

길산포(吉山浦)의 역사는 ‘길산’이라는 지역성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길산포석교가 있었다고 한다. 길산포석교는 서천과 한산 사람들이 길산천을 오갈 때 이용하던 교량이었으며, 1703년 중건한 기념비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길산교 주변에 길산장이 개설되었는데, 길산장은 주변의 서천과 한산의 읍내장보다 규모가 컸다. 길산장길산천으로 들어오는 선박을 통하여 해산물이 유입되었고, 반대로 서천 지역의 미곡이 이출되었다. 이로써 길산포는 자연스럽게 서천 지역의 중심 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길산에는 원(院)도 설치되어 있었다. 주요 길목이었으므로 서천과 한산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던 공간이었다.

[내용]

길산포가 언제부터 서천 지역에서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길산포는 서천 지역에서 금강의 수운과 연계되는 가장 가까운 포구였다. 최초의 장시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 길산장이 열렸다는 기록으로 확인되는데, 그 이전부터 길산포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길산장은 매월 4일과 9일에 열렸다.

일제 강점기에도 길산장은 중요 포구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1930년대 초반 충청남도 지역 쌀의 총집산지가 길산포였다고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당시 충청남도청에서는 길산포에 모인 미곡을 수출하기 위하여 장항역길산포를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할 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하천조사서(朝鮮河川調査書)』에 따르면, 길산포에 드나들던 선박은 200~300석을 실을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당시 강경포의 물량보다는 적었으나 공주나 부여에 있던 포구에 비하면 2배가 넘는 규모였다. 당시 길산포가 강경포 다음으로 큰 금강 지역의 포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천]

일제 강점기 길산포가 번성하면서 포구 노동자들이 각종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1924년에는 포구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길산노동조합 총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서천 지역의 포구 기능은 장항항으로 이전되었다. 장항항에 근대식 항구 시설이 건립되면서 점차 물산의 집적이 길산이 아닌 장항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미곡 집산 기능은 간간이 유지되었으나 1990년 금강하굿둑이 건설되면서 길산포는 포구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의의와 평가]

길산포서천읍 삼산리에서 조선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운영되던 포구이다. 길산포판교천길산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서 금강 하구와 서천 해안을 수로로 연결하기 쉬운 이점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천 지역뿐만 아니라 부여와 보령 지역의 미곡이 길산포로 집산되어 길산천금강을 통하여 군산으로 모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이래 서천 지역의 경제 중심지로서 기능한 길산포의 역사를 통하여 서천 지역의 경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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