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포대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385
한자 鎭浦大捷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진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오치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380년연표보기 - 진포대첩 개시
종결 시기/일시 1380년 - 진포대첩 종료
발생|시작 장소 진포 -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지도보기 일대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심덕부|나세|최무선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진포에서 고려군이 왜구에게 큰 승리를 거둔 해전.

[개설]

진포대첩(鎭浦大捷) 은 1380년(우왕 6) 금강 하류에 있는 진포(鎭浦)[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일대에서 고려군이 함포를 발사하여 왜구의 병선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한국사상 최초로 화포를 이용한 해상 공격이 이루어졌다.

[역사적 배경]

왜구의 고려 침입이 시작된 것은 대략 고려 후기인 고종 재위 초였다. 이때는 침입 규모가 큰 편이 아니었으나 시간이 지나 1350년(충정왕 2)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고려 전역을 대상으로 왜구 침입이 발생하였으며, 약탈의 범위가 확대되고 빈도도 매우 잦아졌다. 이에 따라 고려 조정에서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였는데, 당시 대책과 관련하여 중요한 인물이 바로 화포를 개발한 최무선이었다. 최무선의 노력으로 1377년(우왕 3) 화통도감(火㷁都監)이 설치되고 이후 화약 무기가 생산되었다. 또한 화약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화포의 개발과 화포를 탑재할 수 있는 전함 건조 및 수군 병력 증강 등의 노력이 병행되었다. 그 결과 고려는 바다에서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공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경과]

진포는 왜구들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다. 왜구는 대규모 함선을 끌고 와서 정박하고 해안으로 상륙하여 충청도와 양광도 연해를 노략질하였다. 『고려사(高麗史)』 등에는 1380년 침입한 왜구의 함선이 500척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하고, 나세(羅世)를 상원수(上元帥)로 임명하고, 최무선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전함 100척과 함께 진포에 급파하였다. 고려의 수군을 본 왜구는 전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함선을 모아서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함포 사격에는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집결한 왜선을 화포를 이용하여 격파하고 불태우자 왜구는 손쉽게 무너져 달아났다.

[결과]

고려군의 승리로 왜선은 모두 불에 타거나 선박으로서 기능을 잃게 되었고, 잡혔던 포로도 구출할 수 있었다. 승전 소식이 알려지자 고려 조정은 크게 기뻐하여 참전한 세 원수와 부장들에게 후한 포상을 내렸다. 고려군의 대승은 분명하였으나 화염에서 살아남은 왜구들은 퇴로가 막히자 내륙으로 깊숙이 침투하여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이르렀으며 궁지에 몰려 더욱 잔인하여졌다. 이후 준동하는 왜구는 이성계 등의 고려군을 파견하여 소탕하였다.

[의의와 평가]

진포대첩 은 화포를 사용한 전투라는 점에서 전쟁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고려를 끊임없이 괴롭혀 온 왜구에 대하여 큰 승리를 거두면서 왜구의 기세를 꺾은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아울러 진포대첩의 결과 남아 있는 왜구 잔당을 척결하는 과정에서 이성계 등의 무장 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는 점에서 이후 조선 왕조의 개국과도 연결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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