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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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수환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의 문호 신광수와 신석초에 대한 이야기.
[개설]
충청남도 서천군은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1712~1775] 네 남매를 포함하여 ‘고령 신씨(高靈 申氏) 8문장가’를 배출한 지역이다. 1950년대 한국 현대 문학 시인으로 명성을 떨친 후손 석초(石初) 신응식(申應植)[1909~1975]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기도 하다. 신광수를 비롯하여 고령 신씨 후손들이 성장하면서 문학을 꽃피웠던 곳인 숭문동(崇文洞)은 지금의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 지역이다. 신광수의 문집인 『석북집(石北集)』을 보면 숭문동을 배경으로 한 문학 작품이 실려 있다.
[한산군 숭문동에서 꽃피웠던 고령 문호의 명가]
신광수의 고향 숭문동은 ‘문학과 문화를 숭상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옛 한산군(韓山郡)의 속하는 지역인데,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며 조선 건국의 주역들을 길러 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고향이기도 하다. 고령 신씨인 신광수의 6대조 참판공 신영원(申永源)[1496~1572]이 전라남도 순창 지역에서 한산군 숭문동으로 옮겨 와 정착하면서 이색의 후손 이윤수(李允秀)의 딸과 결혼하여 숭문동 처가에서 살았다. 신영원의 아들은 어성(漁城) 신담(申湛)[1519~1595]이다. 신담은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이었다. 후손인 신호(申澔)[1687~1767]와 혼인한 성산 이씨(星山 李氏)는 석북 신광수, 기록(騎鹿) 신광연(申光演)[1715~1778]을 낳고 일찍 죽었다. 이후 이천령(李千齡)의 딸인 둘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1729~1796]와 여류 시인 부용당 신씨(芙蓉堂 申氏)[1732~1791]를 낳았다. 고령 신씨는 숭문동에서 신광수 네 남매와 신광수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등 ‘고령 신씨 8문장가’를 배출하였다. 또 신광수의 7대손인 신석초(申石艸)[신응식(申應植), 1909~1975]도 1950년대 한국의 대표 시인이다.
[석북 신광수의 생애와 활동]
석북 신광수는 1712년(숙종 38) 2월 3일 한성부(漢城府) 가회방(嘉會坊) 재동(宰洞)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글을 짓기 시작하였다. 1761년(영조 37) 49세 늦은 나이로 영릉참봉(寧陵參奉)에 나갈 때까지 유년기와 성장기, 중년기를 지켜 준 곳이 한산군의 고을 숭문동이었다. 그래서 숭문동에서 살던 시기에 시골 생활을 배경으로 한 시가 집중적으로 지어졌다. 31세 되던 해에는 숭문동에서 「시인(詩人)」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동네 어귀 복사꽃이 활짝 피어서/ 남쪽 이웃 눈 안에도 환히 비추네/ 흥을 따라 시인은 마음대로 노닐고/ 제철 만난 봄새도 재잘재잘 노래하네./ 만물의 기운은 날마다 되살아나네./ 저녁 바람에 흰 머리칼을 흩날리며/ 시냇가에서 마음을 가누지 못하노라.”라는 내용이다.
집안이 남인이라서 초기에는 벼슬길이 막혀 향리에서 시작하였다. 채제공(蔡濟恭)[1720~1799], 이헌경(李獻慶)[1719~1791], 이동운(李東運)[1694~1743]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공제(恭齊)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다. 39세에 진사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다. 49세에 영릉참봉(英陵參奉)이 되고, 53세에 금오랑(金吾郎)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표류하였다. 제주도에 40여 일 머무르는 동안에 「탐라록(耽羅錄)」을 지었다. 그 뒤에 선공봉사(繕工奉事), 돈녕주부(敦寧主簿),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신광수는 1772년(영조 48) 61세에 기로과(耆老科)에 장원하여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에서는 문장의 신하를 얻었다고 하였다. 영조(英祖)는 신광수를 대단히 대우하여 서울에 거주할 집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그 뒤에 우승지(右承旨), 영월부사(寧越府使)를 역임하였다. 신광수는 과시(科詩)에 능하여 시명(詩名)을 세상에 떨쳤다. 신광수의 시인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관산융마(關山戎馬)]는 창(唱)으로 널리 불렸다. 신광수는 사실적인 필치로 당시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농촌의 피폐상과 관리의 부정과 횡포 및 하층민의 고난을 시의 소재로 택하였다.
악부체(樂府體)의 시로서는 「관서악부(關西樂府)」가 유명하다. 신광수의 시에 대하여 교우 채제공은 “득의작(得意作)은 삼당(三唐)을 따를 만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라도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을 능가하며 동인(東人)의 누습(陋習)을 벗어났다.”라고 평하였다. 신광수는 동방의 백낙천(白樂天)[백거이(白居易), 772~846]이라는 칭을 받기도 하였다. 신광수의 시는 시대의 현실을 담고 있거나 우리나라의 신화나 역사를 소재로 하여 민요풍의 한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한문학사상 의의가 매우 크다. 저서로 『석북집』 16권 8책과 『석북과시집(石北科詩集)』 1책이 전한다.
[곤궁한 삶 속에서 꽃피운 가족의 문원]
신광수의 선대 6대조 참판공 신영원의 아들 어성 신담은 고령 신씨 가문의 위상을 한층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홍문관부제학, 이조참판,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면서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신담 이후 신광수의 아버지 신호에 이르기까지는 숭문동이 가문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으나 현달한 인물들을 배출하지 못한 채 곤궁한 삶을 살아갔다. 특히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1728]의 난은 관료로의 진출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 사는 먼 친족 신천영(申天永)[1690~1728]이 반란군에 가담하였던 까닭에 고령 신씨 전체가 정거처분(停擧處分)이 되는 비운을 맞았다. 정거처분 조치에 숭문동의 신씨 가문은 탄원과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려 한산군 지역 신씨 가문에 한하여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남인의 열세여서 대과의 문턱을 쉽게 넘지 못하였다. 아들 신우상(申禹相)이 대과에 급제하고 다음 해에 신광수가 61세의 나이로 기로과에 합격할 때까지 낙방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갔다. 영조 말년에 남인의 정치적 세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이후에도 신광수 삼 형제를 비롯하여 조카들은 과시에서 낙방하여 좌절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곤궁한 삶 속에서도 문학의 전통을 긍지로 삼아 갈고닦았다. 셋째 동생 신광하(申光河)가 “시는 우리 집안의 특기이다. 문장은 천고의 사업인데, 우리 형제 신광수, 신광하가 명성을 떨쳤도다.”라고 자부한 것도 가문의 전통과 문학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신씨 가문의 문학 교육이 남자들에게만 제한된 것은 아니다. 이복동생 부용당 신씨의 생애를 회고한 조카 신석상(申奭相)[1737~1816]은 고모와 조카들이 신광수에게 함께 시문을 배웠다고 하였다. 개방적 가풍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신광수의 동생 신광하는 증손 신병(申秉)에게 “문장은 우리 집안의 일이니라. 우리 집안은 선대로부터 우리 형제 세 사람[신광수, 신광연, 신광하]과 너의 부형들[신우상, 신이상(申履相), 신석상(申奭相) 등 다섯 형제]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서 명성을 이어 왔다. 그런데 지금에는 끊어지게 되었으니 매우 슬프구나. 그 책임이 너에게 있으니 너는 힘쓰도록 하여라.”라고 당부하였다고 전한다. 신광수는 61세 기로과에 장원하면서 승지로 나갔다가 64세가 되던 해 파주 장릉(長陵)[인조의 묘]의 제관으로 가던 중 찬비를 맞고 감기에 걸렸다가 4일 만인 1775년(영조 51) 4월 26일 사망하였다. 그 후 장례는 6월 15일 한산군 숭문동에서 지냈다.
신광하는 정조(正祖)가 아끼던 신하였다. 정조 앞에서 당대의 문장가를 모아 놓고 한양 도성을 시로써 그려 내라고 하였는데, 신광하가 장원에 뽑혔다. 이때 신광하가 지은 작품이 「성시전도(城市全圖)」이다. 정조는 직접 채점을 통하여 “과연 글에 소리와 그림이 있구나[有聲畵].”라고 칭찬을 하였을 정도의 문장가였다. 신광하는 1751년(영조 2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그 후 전국을 유람하고, 1778년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하였으며, 1784년 백두산(白頭山)에 올라서 대각산(大角山)에서 산제(山祭)를 지내고, 추풍등대각(秋風登大角)에 낙일견중원(落日見中原)의 시구를 남겼다.
1786년 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에 제수되고, 의금부도사·형조좌랑·인제현감(麟蹄縣監)·우승지·공조참의를 거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신광하는 일생 동안 시문(詩文)을 좋아하여 삼천리강산을 유람하며 지은 시를 『남유록(南遊錄)』·『사군록(四郡錄)』·『동유록(東遊錄)』·『북유록(北遊錄)』·『백두록(白頭錄)』·『풍악록(楓岳錄)』·『서유록(西遊錄)』 등으로 묶어서 2,000여 수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곡석북선생(哭石北先生)」 100수, 『동해록(東海錄)』 중의 「금강산가(金剛山歌)」·「구룡폭포가(九龍瀑布歌)」 등은 소슬한 진경을 묘사하고 있고, 『서유기(西遊記)』 중의 「파옥가(破屋歌)」와 신광하의 만년작인 「군불견진택선생가(君不見震澤先生歌)」 등은 백미(白眉)의 시구라 할 것이다. 이외에도 단양산수(丹陽山水)의 청초하고도 기이한 풍경을 그림같이 그려 내는 사군기행(四郡紀行)이나 50여 일을 답사하며 그림처럼 묘사한 금강유람(金剛遊覽)의 기행은 고금을 통하여 가장 상세한 기행문이라 할 것이다. 신광하는 목만중(睦萬中)[1727~1810]·이헌경·정범조(丁範祖)[1723~1801] 등과 함께 당대 사문장(四文章)으로 꼽히었다. 저서로는 『진택문집(震澤文集)』이 있다.
[1950년대 한국의 대표 시인 신석초]
신석초의 본명은 신응식이다. 일명은 유인(唯仁)이며, 호는 석초(石艸, 石初)이다. 신광수의 7대손이며, 아버지는 신긍우(申肯雨)이다. 신석초도 신광수의 학문이 이어져 1950년대까지 명성을 떨친 고령 문호이다.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병으로 중퇴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였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맹원으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프랑스 문학, 특히 폴 발레리(Paul Valery)[1871~1945]에 크게 심취하였으며, 1935년에는 잡지 『신조선(新朝鮮)』의 편집을 맡았고, 1948년에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54년 한국일보사에 입사하여 1957년에는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예술원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에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신석초의 문단 활동은 1931년 ‘신유인(申唯仁)’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일보』에 「문학 창작의 고정화(固定化)에 항(抗)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석초의 논문은 볼셰비키화한 카프의 창작 방법론의 강요에 항의하는 내용으로서, 카프의 창작 방법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자신의 가정 환경이나 폴 발레리의 작품 「텍스트씨」를 읽은 감동 등으로 사상적 고민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박영희(朴英熙)[1901~1950]의 전향 선언과 함께 1933년 탈퇴원을 제출하고, 1934년 카프의 해산과 함께 관계를 끓었다. 1935년 무렵부터 이육사(李陸史)[이원록(李源祿), 1904~1944]와 알게 되어 막역한 지기(知己)가 되었고, 서정주(徐廷柱)[1915~2000]·김광균(金光均)[1914~1993]·윤곤강(尹崑崗)[1911~1949] 등과 함께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호접(胡蝶)」·「무녀의 춤」을 『자오선』 1호에 발표하였고, 이어 1939년 『시학(詩學)』에 「파초(芭蕉)」[1호]·「가야금(伽倻琴)」[2호]·「묘(墓)」[4호] 등을 발표하였다.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이 폐간되자 침묵을 지킴으로써 친일 문학에 동조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광복과 더불어 1946년 제1시집 『석초시집(石艸詩集)』을 간행하였다.
이어 1959년에는 제2시집 『바라춤』, 1970년 제3시집 『폭풍의 노래』, 1974년 제4집 『처용(處容)은 말한다』와 제5시집 『수유동운(水踰洞韻)』을 간행하였다. 그는 대체로 엄격한 구성과 고전적 심미성을 추구하는 작품 세계를 전개하여 왔는데, 이러한 작품 세계는 발레리와 노장사상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구축되고 있다.
[1975년 『숭문연방집』 간행으로 숭문동 8문장가 확인]
1975년 ‘신광수 서거 200주년’을 맞아 한국한문학연구회에서 진행한 『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을 출간함으로써 고령 신씨 숭문동 8문장가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났다. 『숭문연방집』은 한산군 숭문동에 세거한 신광수, 신광연, 신광하, 여동생 부용당 신씨의 문집을 모아 간행한 것인데, 당시 한국한문학회장 이가원(李家源)이 해제를 썼다. 이때 신광수 형제를 비롯하여 아들 조카 등을 ‘고령 신씨 숭문동의 8문장가’라고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