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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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가정,목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경동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이곡과 이색에 대한 이야기.
[개설]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과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은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서 무너져 가는 고려의 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부자지간이었던 두 사람은 모두 고려와 원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하였고, 고려 중앙의 요직을 차지하며 온건 개혁파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이색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렸는데, 조선 건국 후에도 학문적 위상을 존중받았으며, 조선 후기에는 여러 지역에서 이색을 배향하는 서원이 설립되었다.
[이곡의 생애와 업적]
이곡은 한산군(韓山郡)[현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의 향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1317년 처음 과거에 급제한 후 경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1331년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다. 1332년에는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한 뒤 원나라의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당시 고려 출신이 제과에 급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 석차가 낮았는데, 이곡은 2갑에 선발되어 원나라에서 한림국사원검열관에 임명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와 원에서 관직을 두루 거치며 이곡은 당대 저명한 성리학자이자 관료로서 성장하였다.
고려 후기 이곡의 업적으로는 1346년 충목왕의 지시에 따라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보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에 대한 3대 실록을 편찬한 것과 원나라에 공녀를 차출하여 바치는 폐단을 개혁하고자 시도한 것을 들 수 있다. 『편년강목』은 1317년에 편찬된 역사서였는데, 충목왕은 『편년강목』에 부족한 내용이 많음을 지적하며 새롭게 증보하고자 하였다. 또한 선대왕들의 실록을 편찬하여 고려의 역사를 바로세우고자 하였고, 이때 이곡을 비롯하여 이제현(李齊賢)·안축(安軸)·안진(安震)·이인복(李仁復) 등을 동원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해당 사료들은 현전하고 있지 않지만 역사서를 편찬할 때 이곡을 중용하였다는 점에서 이곡이 역사 저술에 참여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문장가로서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녀 문제는 원 간섭기 동안 고려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1231년을 시작으로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원나라 이후 등장한 명나라에서도 초창기에 일시적으로 조선의 공녀를 요구하였다. 다만 1231년 원나라의 최초 공녀 요구는 고려 왕족과 대관인의 아들과 딸 각각 1,000명을 요구하였던 것이기 때문에 이후 공녀 요구와는 차이가 있다. 본격적인 공녀 요구는 1274년부터였는데, 원나라에서는 남편이 없는 부녀자 140명을 원나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공녀를 차출하는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번져 곤란하였는데, 1335년 이곡이 원나라 순치제 토곤테무르에게 「청파취동녀서(請破取童女書)」를 올려 공녀 요구의 문제점과 중단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원나라의 공녀 요구가 중단되었다. 이곡의 건의 이후에도 원나라에서 공녀를 요구하긴 하였지만, 이전보다는 횟수와 규모가 줄어들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색의 생애와 개혁론]
이색은 이곡의 아들로 태어나 1341년 처음 과거에 급제한 후 1354년 원나라 제과(制科)에 2갑으로 급제하여 응봉한림문자에 임명되었다. 아버지 이곡에 이어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학문적 수준이 높았음을 증명하였다. 이색은 이곡과 마찬가지로 고려와 원나라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특히 고려에서 여러 요직에 진출하며 국정을 수행하였다. 1361년에는 홍건적에게 개성이 함락되어 공민왕이 남행에 나섰는데, 이때 이색은 공민왕의 남행을 호종하여 이후 공신으로 녹훈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색은 고려 후기 각종 사회 경제적 문제 해결과 성리학 연구, 후학 양성 등에 힘쓰며 고려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색은 1352년 복상 중에 있으면서도 시정 개혁 8개 조문을 작성하여 고려의 각종 제도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색의 개혁안을 정리하면 토지 제도 개혁, 왜구에 대한 방비책 마련, 무과 설치, 교육 제도 개혁, 신설 사찰의 철폐, 도첩이 없는 승려들의 양민 귀속 조치 등이 있었다. 또한, 정방을 혁파하여 이부와 병부 중심으로 인재를 운용할 것도 주장하였다. 특히 토지 제도에 대한 문제는 고려가 멸망하는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만큼 당시 주요한 현안이었다. 고려의 토지 제도는 본래 전시과 체제로서 관료들의 녹봉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전쟁과 기근 등의 원인으로 전시지의 관리에 문제가 생겼을 뿐 아니라 공음전시와 영업전이 성행하면서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전시과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로 인하여 14세기 후반에는 토지 겸병을 바탕으로 대농장이 성행하였는데, 이색은 이와 같은 사태를 지적하며 문제 해결을 주장하였다. 이색의 토지 제도 개혁론은 1314년에 작성된 갑인주안(甲寅柱案)을 바탕으로 ‘일전일주(一田一主)’의 원칙에 따라 개선하자는 것이었다. 이색은 토지 겸병의 문제를 하나의 토지에 다수의 수조권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일전일주의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토지 제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색은 후학 양성과 성리학의 보급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를 위하여 이색은 교육 제도와 과거 제도에 대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시정 개혁 8개 조문에서도 현행 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며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하고 개경에는 학당을 설치하여 재능에 따라 12도(徒)에 승격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12도의 생도 중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입학시키고, 성균관의 학생들은 예부시(禮部試)에 응시시켜 관직에 임명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색은 교육 제도와 과거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새로운 성리학자를 양성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색의 제자로는 정몽주·정도전(鄭道傳)·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하륜(河崙) 등이 있었다. 고려 후기 온건 개혁파와 급진 개혁파 모두 이색의 제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이색은 당시 저명한 학자와 관료들을 다수 길러 냈다. 이색은 사서와 오경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성리학 이해를 도출하였다. 이색은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통하여 이상적 인간향에 도달하여야 함을 강조하는 한편, 당대 현실을 중시하는 예론을 적절히 수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색의 성리학적 사고관은 기존 질서와 새로운 체제를 절충하는 입장이었으며, 윤리 도덕적 정치론을 중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 운영의 개혁에 있어서도 기존의 체제를 고수하는 선에서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토지 제도 개혁론의 경우도 사전 혁파를 주장하였던 정도전·조준(趙浚)과 달리 기존의 전시과 체제 회복을 주장하였다. 과거 제도와 교육 제도에 대한 개혁 역시 본래 고려에 존재하였던 성균관, 12도, 동서학당(東西學堂) 등의 체제를 재정비함으로써 성리학을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이색의 성리학적 가치관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것보다 고려의 제도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개혁하는 온건 개혁파의 논리와 맞닿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곡과 이색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계승]
이곡과 이색이 사망한 후 후대 사람들은 두 사람을 헌창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두 인물을 기념하고 계승함으로써 유교적 가치관을 재생산하였던 것이다. 이곡과 이색에 대한 헌창 사업의 시작은 한산 이씨 문중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한산 이씨 문중에서는 지금의 서천 지역 일부에 해당하는 한산군에 이곡과 이색의 묘역을 조성하고, 1594년 효정사(孝靖祠)를 설치하여 두 인물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다. 1611년 효정사가 문헌서원(文獻書院)으로 위상이 변화하면서 이곡과 이색에 대한 제사뿐 아니라 성리학을 연구하는 공간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이색을 배향하였던 서원은 서천 지역뿐 아니라 전국에 다수 분포하였는데, 경기도의 매산서원(梅山書院)·임강서원(臨江書院), 충청도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전라도의 예양서원(汭陽書院), 경상도의 일신서원(日新書院)·서산서원(西山書院) 등에서 이색을 배향하였다. 이색을 배향하였던 전국 서원의 존재는 후대 사람들이 목은 이색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계승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곡과 이색의 정신을 계승하려 하였던 후대 사람들의 노력은 서원에서뿐만 아니라 문집 및 족보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간행하였던 노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이곡의 문집이었던 『가정집(稼亭集)』은 1364년 이색이 편집하고 이곡의 사위 박상충이 간행하였다. 1422년에는 이곡의 손자 이종선이, 1635년에는 이곡의 후손 이기조가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대구에서 재간행하였다. 『목은집(牧隱集)』은 1404년 이색의 아들 이종선이 처음 간행하였고, 임진왜란 때 판본의 대부분이 분실되었다가 1626년 이색의 10대손 이덕수가 재간행하였다. 다음으로 족보는 한산 이씨 문중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간행하였다. 1643년 강원도관찰사 이덕수의 주도로 서천 한산 이씨 계미보가 간행되었고, 1740년 상주목사 이수보의 주도로 서천 한산 이씨 경신보가 간행되었다. 문중 주도로 간행되었던 문집과 족보는 이색과 이곡의 성리학자로서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가계의 결속을 다져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색에 대한 평가는 사실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이색의 학문적 위상은 인정하였지만 충절에 대한 시비에서는 이색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몽주가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과 달리 이색은 고려의 멸망을 지켜보았다는 것이었다. 조선 성종 대 이후에는 이색의 불교관에 대한 문제가 지적되었는데, 1477년 임사홍(任士洪)이 이제현·정몽주·이색·권근 등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건의하자 성종이 이색은 부처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대답하였다. 조선 전기 이색에 대한 평가는 학문적 위상만을 인정해 주었고, 충의와 기타 행적에 대하여서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색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부터였다. 이항복(李恒福)은 문헌서원의 제향에 사용할 시문을 작성하였는데, 해당 시문에는 이색을 중국 은나라 말엽 절의를 지켰던 백이(伯夷)와 후한 광무제의 친구였지만 관직을 거절하였던 엄자릉(嚴子陵) 등에 비유하였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은 1666년 목은 이색의 신도비를 개수할 때 작성한 글에서 이색의 충절을 높게 평가하였다. 송시열은 고려 말의 역사적 사실들이 이색에게 불리하게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한편, 이색의 충절이 중국의 백이와 숙제(叔齊)에 비교하여도 뒤떨어지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이덕형과 송시열의 평가는 조선 초기와 달리 이색의 성리학적 위상뿐 아니라 충절에 대하여서도 인정하여 주는 분위기였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