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관문에서 수탈의 아픔을 지닌 곳으로, 장항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003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범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에 있는 장항에 대한 이야기.

[간척으로 시작되는 수탈의 역사]

한여름이 되면 사람들이 한쪽에서는 잡초와 갈대가 무성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갯벌이 펼쳐진 곳으로 몰려드는 곳이 있다. 여름이 되면 ‘모래 날’을 지정하여 모래찜질을 하기도 한다.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장암리송림리 일대가 그러한 곳이다. 염분, 철분, 우라늄 성분이 많은 모래가 피부에 특히 좋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부녀자들이 장암리송림리 일대에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장항이라는 곳이 만들어지기 전에 한적한 바닷가 마을은 여름이 되면 심신을 달래 주는 휴양지였던 셈이다.

장항이 발전하게 된 것은 1924년 옥남방조제가 건설된 이후이다. 옥남방조제는 길이 500m가 넘는 매우 큰 제방이었다. 일본인 대지주와 조선총독부가 간척 사업을 실시하기 위하여 방조제를 건설하고 방조제 안쪽에 논농사 지대를 형성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와 서천수리조합은 산미 증식 계획의 일부로 동부저수지서부저수지를 만들어서 수리 시설을 강화하였다. 일본 본토의 부족한 식량을 식민지 조선에서 조달하기 위하여 수리조합을 통한 저수지 축조를 강화하면서 쌀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서천 지역도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산미 증식 계획을 위한 주된 공간이 되었으며, 바로 장항 일대가 그러한 곳이었다.

장항에 가장 먼저 주목한 인물은 일본인 가타키리 가츠조였다. 가타키리 가츠조는 대한제국 시기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와 익산 지역의 토지를 사들였다. 가타키리 가츠조는 익산에서 농장을 개설하고 이후 옥구와 금강 건너의 서천 지역에도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장항 주변의 갯벌을 헐값에 사들이고 농장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가타키리 가츠조는 장항 지역의 토지를 무려 32만 평[약 1.06㎢]이나 소유하였을 만큼 대지주였고 장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가타키리 가츠조는 토지 일부를 철도 용지, 시장 부지, 학교 용지로 매각하거나 기증함으로써 선한 자선가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개발 차익을 노리거나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러한 인물들이 장항 일대에 다수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가 되면 일본인들이 점차 평야 지대가 있는 서천의 중요 거점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장항읍 원수리금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군산을 잇는 나룻배가 통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서천으로 진입하는 주요 지점이 되었다. 이곳을 메우고 항구 시설을 구축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도 일본인이었다. 또한 어떠한 일본인은 수동리에 있던 도선장, 즉 나루터의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이익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들 모두 군산에서 터를 잡고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던 일본인 지주들이었다. 일본인 지주들은 군산 지역의 일본인을 규합하여 주식회사를 설립하는가 하면 더 많은 일본인 자본을 끌어들여서 군산과 같은 대도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일본인 지주들이 주목한 공간이 바로 장항이었다. 장항은 바로 서천 지역에 진출하여 더 큰 이익을 차지하려는 일본인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간척으로 시작하여 매립, 근대 시설 구축으로 장항 지역 수탈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경남선 철도의 부설과 수탈의 시작]

장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단연 장항선 부설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지금의 ‘장항선’이라는 이름은 1955년에 붙여진 것이고 본래의 이름은 ‘경남선’이었다. 경남선은 경남철도주식회사가 부설한 사설 철도였다. 경남철도주식회사는 일본인이 설립한 회사였다. 현재 대한민국은 사설 철도가 없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는 국영 철도 이외에 민간 회사가 부설하고 운영하는 철도가 많았다.

이처럼 장항선은 사설 철도 경남선으로 시작되었다. 경남선은 1929년 경기도의 여주와 이천 지방에서 생산되는 쌀을 빠르게 수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바로 여주와 이천 지방에서 생산된 쌀을 장호원역에서 싣고 천안, 온양, 예산, 홍성, 보령을 거쳐서 장항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쌀을 수탈하는 것이었다. 1922년에는 천안과 온양온천 사이에 철도를 부설하고, 1929년에는 천안과 장호원을 연결하는 철도를 개설하였다. 1930년에는 판교와 장항을 연결하는 철도선이, 1931년에는 지금의 장항선 구간이 전부 완공되었다. 열차는 하루에 2회 운영되었다. 5~6량의 열차를 운행하였는데, 객차는 1량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화물차였다. 화물차 한 칸에는 쌀 300가마를 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경기 남부 지역의 쌀이 빠르게 장항항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 일본인들은 장호원의 경기미와 예산과 당진의 충청미를 일본으로 실어 내는 식민지 수탈의 현장으로 장항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철도 부설을 위하여서는 재료가 제시간에 운반되어야 하였다. 장항 부근의 철로 부설은 장항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는 장항항 부근에 잔교를 설치하고 선박을 통하여 철도 건설의 부재를 조달하였다. 서울의 용산공작소에서 제작된 철도 차량이 인천항을 통하여 장항항으로 운반되었다. 객차는 60인식 2량과 화물차 12량이었다. 조립이 끝난 열차는 1930년 11월 1일 처음으로 판교까지 운행하기 시작하였다. 주된 역으로는 판교역, 기동역, 서천역, 송내역, 장항역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판교역, 서천역, 장항역에는 역사가 들어서고 역무원이 배치되었다. 나머지는 간이역이었다. 장항에서 출발하는 열차가 되돌아오는 데에는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경남선의 계획 당시의 종착역은 장항역이 아니었다. 1924년 설계 당시에는 수동리가 경남선의 종착역이었다. 수동리에서 군산으로 통하는 도선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지주들은 장항리에 있던 철도 용지 3만 평[약 0.099㎢]을 회사에 기증을 하였고 종착역을 장항으로 바꾸었다. 수동리의 역사 설립 조건이 장항보다 좋지 않다는 점을 주장한 것이다. 결국 수동리에서 도선장을 관리하던 일본인과 장항의 일본인 지주 사이에서 이권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장항의 일본인 지주가 승리를 한 셈이다. 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는 경남선 철도 이용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철도 교통의 편리함을 강조하였다. 당시 서천 사람들은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 군산에서 기차를 타고 이리, 대전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장항역을 이용하면 군산, 이리, 대전을 거치지 않고도 직접 서울에 갈 수 있었다. 1931년 모든 구간이 개통된 이후에는 하루 평균 100명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객보다 더 많은 쌀이 경남선 철도에 몸을 실었다.

[매립의 시작과 수탈의 확장]

경남선 철도가 부설되고 장항역 운영이 시작되면서 수탈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제는 더 많은 수탈을 위하여 더 넓은 기반 시설과 공간이 필요하였다. 장항은 좁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바닷가 쪽으로 더 넓은 공간을 활용하여야 하였다. 또한 수탈을 위하여서는 철로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선박을 통하여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하여 근대적인 항구가 필요하였다. 당시 장항은 서해안이 모두 그렇듯이 조수 간만의 차가 컸고, 장항 앞바다가 갯벌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매립지가 필요하였다. 땅을 구매하는 것보다 공유 수면이었기 때문에 자본을 투자하여 매립이 추진되었다. 철로 건설 이후 장항의 매립 공사가 빠르게 진행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일본인 소유의 1만 3000평[약 0.043㎢]의 매립이 우선 추진되었다. 항구가 건설되었고, 축항 기공식이 1932년 4월에 이루어졌다. 경남선 개통 이듬해에 이루어진 것을 보면 장항항 개발이 왜 필요하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아울러 금강 하구에 대한 준설 작업도 진행되었다. 대형 선박이 정박하려면 흘수를 고려하여 수심이 깊어야 하였다. 주요 정박 지점에 대한 준설과 항만 기반 공사가 이루어졌다. 장항항에 도착한 쌀을 선박에 싣기 위하여 일정 기간 동안 항구에 쌓아두어야 하였다. 노상에 두면 쌀의 품질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야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쌀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야 하였다. 항구의 부대시설로 미곡 창고는 그래서 만들어졌다. 미곡 창고는 당연히 경남선을 운영하던 경남철도주식회사가 만들었으며 창고의 규모는 600여 평[약 1,983㎡]이 넘었다. 당시 경남철도주식회사가 운영하는 창고로 만들어진 미곡 창고는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수탈의 현장을 볼 수 있다. 매립이 진행되면서 장항잔교역도 준공되었다. 잔교역은 장항역에서 약 700m 떨어져 있는데 창고 시설과 여객 화물 취급소가 만들어졌다. 잔교역은 장항역에 도착한 열차가 직접 항구에 진입하여 선박에 바로 적재할 수 있도록 만든 역이었다.

[무역항 장항항과 수탈의 본격화]

매립지가 늘어나도 장항에 본격적인 도시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면서 일본에 의한 쌀 수탈은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기 위하여 반드시 항구가 필요하였다. 선박 운송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항항의 항구 기능이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장항에서 일본의 선박에 쌀을 싣고 운반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11월부터였다. 당시 장항항은 충남에서 유일한 무역항이었다. 문제는 쌀 운반을 위한 항구 접안 시설이 매우 미약하다는 것이었다. 매립이 진행되고 접안을 위한 잔교가 부설되었으며 철로가 잔교역까지 이어지면서 이제 본격적인 항구의 역할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장항항이 무역항으로 성장하기 위한 일에 충청남도청도 발벗고 나섰다. 당시 서천 지역에서 생산되던 쌀은 군산을 거쳐 일본으로 수탈되었는데, 군산에서 출발하다 보니 서천 지역에서 생산된 쌀이 ‘전북미’라는 이름으로 팔려 나간 것이다. 보다 못한 충청남도에서는 충남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으로 보내지 말고 장항항에서 실어 나를 수 있도록 처리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쌀은 ‘충남미’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주요 시장에 팔렸다. 그래서 충청남도청에서는 장항의 항만 시설 구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장의 개설과 비행장 건설 시도]

장항이 점차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조선의 전통 시장인 오일장의 개설에 대한 필요성도 등장했다. 마동면장의 이름으로 장항 시장에 대한 설치 신청서가 충청남도에 제출되었다. 시장이 개설되는 공간은 일본인 지주가 기증한 땅 1,000여 평[약 3,306㎡]으로 수동리와 장항리에 위치한 매립지였다. 시장의 허가는 1933년 3월에 이루어졌고 4월부터 시장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장날은 3일과 8일로 결정되었다. 4월 17일 첫 개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때 하늘에 비행기가 날면서 시장 개설을 축하하였다고 한다.

장항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매우 특이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바로 비행장의 건설이다. 일본인을 중심으로 비행학교의 분교를 장항에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비행사 이와이라는 인물이 장항읍 성주리에 불시착한 기념으로 장항에 비행학교 설립을 시도한 것이다. 장항의 매립지가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군산 지역의 일본인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군산항공학교 장항비행장’이라고 이름을 짓고, ‘금강호’라고 명명된 비행기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비행장 설치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해당 비행장 부지에는 1960년대 풍농비료 공장이 들어섰다. 풍농비료공장 부지의 역사는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 장항비행장 건설 시도는 장항의 개발과 수탈의 역사에서 특이한 지점을 차지한다.

[상수도 건설과 장항읍의 승격]

장항이 본격적으로 도시화되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상수도였다. 장항의 식수 문제는 당시 매우 골칫거리였다. 장항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바닷가를 매립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물 부족 문제는 도시 발전을 위하여 반드시 해결하여야 하였다. 장항 시가지에 사는 300여 호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천군청에 공동 우물을 만들어 달라고 건의도 하였다. 결국 서천군에서는 장항 시가지에 상수도 시설을 시행하기로 하였고 상수도 정수장을 완공하였다. 1939년 6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통수식이 개최되어 근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장항이 근대 도시로 성장하면서 장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 주민들은 행정 구역 개편을 추진하였다. 당시 장항은 서천군의 읍치인 서천읍보다 경제 규모가 더 컸다. 그래서 군청과 경찰서를 장항으로 이전하고자 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군청과 경찰서를 장항으로 옮긴다는 것은 장항을 서천 지역의 행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시도였다. 또한 장항은 당시 읍(邑)이 아니었다. 장항읍을 만들고 동리의 명칭을 일본식 행정 구역 명칭으로 바꾸었다. 장항은 서천군에서 최초로 승격한 읍이 되었다. 일본어 간판이 시가지를 도배하는 도시가 된 것이다. 결국 장항을 중심으로 전개된 수탈의 역사가 정점에 이른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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