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1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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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경희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10년 2월 9일 -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발견한 부처 바위」 이돈직에게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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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5년 12월 8일 -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발견한 부처 바위」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4-8-충청남도 서천군에 수록 |
관련 지명 | 인왕산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2-1 |
채록지 | 군사리 -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 |
성격 | 설화|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이성계|정도전|무학대사 |
모티프 유형 | 정치 이념과 부처 바위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에 인왕산 자락의 부처 바위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발견한 부처 바위」는 조선 개국 무렵 인왕산(仁王山, 仁旺山) 자락에서 부처 모양의 바위가 발견되었으나 유교 중심의 정치 이념에 의하여 도성 밖으로 내보내졌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발견한 부처 바위」는 2010년 2월 9일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 주민 이돈직에게 채록하였다. 2015년 12월 8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4-8-충청남도 서천군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는 조선 건국 후 정도전(鄭道傳)[1342~1398]을 비롯한 신진 사대부와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조선의 기틀을 다지기 위하여 도읍을 한양[현 서울특별시]으로 옮겼다. 성터의 위치 선정 및 공사 준비는 정도전이 진두지휘하고 있었는데, 도성을 쌓던 도중에 인왕산 자락에서 사람 크기의 부처 모양 바위가 발견되었다. 그때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는 부처 바위를 도성 안에 두자고 하였고, 정도전은 도성 밖으로 내보내자고 하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옥신각신하였였다. 결국에는 정도전의 의견대로 부처 바위는 도성 밖으로 내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무학대사가 이제 불교는 틀렸구나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조선은 유교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불교가 국가 정치 이념이었던 고려의 흔적과 관련된 어떠한 것도 남겨 두지 않았던 것이다.
[모티프 분석]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발견한 부처 바위」의 모티프는 ‘정치 이념과 부처 바위’이다. 한곳에 늘 가만히 있던 부처 모양의 바위일 뿐인데, 국가 정치 이념에 따라 숭배의 대상이던 부처 바위가 도성 밖으로 배척당하는 존재로 변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조선 왕조 초기 불교 억제책으로 불교의 교세가 크게 약화된 시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정도전은 1398년 집필한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가 국가에 유해한 종교라는 신랄한 비판을 펼쳤는데, 정도전의 정치 철학이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발견한 부처 바위」에 함축적으로 반영되어 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