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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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平山 申氏 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성산리|율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수환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성산리와 율리에 있는 평산 신씨 집성촌.
[명칭 유래]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의 성산리와 율리는 이웃한 마을이다. 성산리는 삼국 시대 백제 때 비중현, 남북국 시대 통일 신라 때는 비비현, 고려 때는 비인현에 속하였던 지역이다. 조선 전기인 1413년(태종 13) 비인현이었다가, 조선 후기 비인군 북면 지역에 속하여 성산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미력리(未力里) 일부를 합하여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성산리로 개설되었다.
이웃한 율리도 조선 후기 비인군 북면 지역이었으며, 밤이 많이 나온다고 하여 율리라 불렀고, 밤골 또는 율동(栗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냉정리(冷井里)와 둔덕리(屯德里)를 합하여 율리라 하여 서천군 비인면에 편입하였다. 둔덕, 밤골, 참새골, 석천골 등 4개 반으로 구성되었다. 평산 신씨가 전체 인구의 85%를 차지한다.
성산리와 율리는 1914년부터 공식 행정 구역 명칭이 되었지만, ‘율리’라는 명칭은 예전부터 율동리(栗洞里)로 사용되어 왔다. 1760년(영조 36)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율동리는 관문에서 북쪽 10리[약 4㎞]에 있고, 인구는 78호로 남자 210명, 여 240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편찬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나 1871년 편찬한 『호서읍지(湖西邑誌)』 비인현(庇仁縣) 방리(方里) 북부면(北北面)의 기록에는 비인현의 마을별 인구 현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형성 및 변천]
1355년경 평산 신씨 13세 신기(申淇)[1365~1393]가 두문동[지금의 황해북도 개풍군 연릉리 두문동]에 들어가 참화를 당하자 신기의 아들 통덕랑(通德郞) 신룡(申龍)이 아버지를 초혼(招魂)하여 서천군 서면 월리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그 후 22세 신여공(申汝恭)이 서천군 비인면 성산리와 율리에 정착하여 살았다. 신여공의 후손은 서천군 비인면 율리에 40여 호, 성산리에 60여 호, 관리에 35호, 종천면 신검리에 20여 호, 화산리(花山里)에 40여 호, 종천리에 20여 호, 당정리에 10여 호, 랑평리에 10여 호, 판교면 문곡리에 10여 호, 심동리에 10여 호, 상좌리에 30여 호, 우라리에 10여 호, 저산리에 10여 호 등이 거주한다. 서천군 내에서 다수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서천 지역의 평산 신씨 중 신여공의 후손 70%가 서천군 비인면 성산리와 율리에 세거한다.
[자연환경]
성산리와 율리는 서천군 비인면의 진산인 월명산의 동쪽 계곡에 있다. 월명산 자락에서 성산천이 계곡을 따라 종천천으로 흘러 서해로 유입한다. 성산리와 율리는 청정 지역 산골마을로 주로 밭농사를 짓고 있다.
[현황]
1970년대 평산 신씨 집성촌인 비인면 성산리에 80가구, 율리에 70가구 등 총 150여 가구가 살았다. 2023년 현재 서천군 비인면 성산리 264만㎡에 60가구, 서천군 비인면 율리 34만㎡에 65가구가 살고 있다. 그중 평산 신씨는 서천군 비인면 성산리에 40가구, 서천군 비인면 율리에 42가구다. 그 외 나머지 가구는 장수 황씨, 광산 김씨, 교화 노씨 등이며, 인척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는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율리에 평산 신씨 시조인 신숭겸과 후손을 배향한 율리사(栗里祠)[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가 있다. 율리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제사를 지낸다. 그 밖에 서천군 비인면 성산리·율리에 입향한 통덕랑 신룡과 후손 신철, 신오의 묘, 신철의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