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46
한자 現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민석

[정의]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충청남도 서천군의 역사.

[개설]

해방 이후인 1947년 말 충청남도 서천군 인구는 13만 명이었다. 1947년 일제 강점기 건설된 장항제련소가 재가동되며 서천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었고 1964년에는 장항항이 국제항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1979년 5월 1일 서천면이 서천읍으로 승격되어 지역 거점 도시로의 발전도 기대되었다. 그러나 비인면, 장항읍 산업 단지 개발 취소와 지연 속에서 서천군은 점차 낙후되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침체되었던 서천군은 2000년대 서해안 시대가 개막되며 국립생태원, 국립해양생물자원관, 장항국가생태산업단지 등의 조성으로 인하여 생태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정치]

해방 이후 1948년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서천에서는 미군정 시기 농림부장을 역임한 이훈구(李勳求)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0년 실시된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의사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구덕환(丘德煥)이 현직 의원 이훈구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훈구와 구덕환은 해방 이후 서천군을 대표하며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나 구덕환은 6·25전쟁 당시 납북되었고, 이훈구는 1961년 사망하였다. 1960년대 이후 서천군 출신으로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남장 여성 정치인으로 유명한 김옥선(金玉仙)이었다. 김옥선은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패배하였지만 여당인 공화당의 부정 선거를 고발하여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하였고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후 국회 내에서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규탄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경제]

한국 경제는 1960~1970년대 고도성장에 돌입하였지만 이 기간 서천군은 낙후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6년 4월 비인공업단지 개발을 추진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1976년 10월 무산되었다. 1960년대 중반 특화 산업화에 따른 농촌 공업화로 한산모시 등의 인기가 높아졌고 농어민 소득 증대를 위한 특별 사업 계획이 추진되어 서천군에 양식 어업 단지 설립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조업이 아닌 농업과 어업에 치우친 서천 지역 경제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1978년부터 서면 마량리 일대에 서천화력발전소가 착공되어 충청남도 보령시와 부여군에서 채굴되는 석탄 생산량의 61% 정도를 소비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79년 동백정해수욕장이 폐쇄되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서천군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1980년부터 논의된 서해안고속도로가 1990년 12월 착공하여 2001년 12월 21일 완공되었다. 이로 인하여 서해안 관광 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산업 단지 조성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1989년 군장[군산, 장항]국가산업단지가 지정되어 자동차 및 관련 부품 업종과 기계, 화학, 목재, 제지 등을 유치하고자 하였지만 환경 파괴 문제 등으로 지연되었다. 서천 지역 사회의 반발이 격하여지는 가운데 정부는 2007년 국립생태원, 국립해양생물자원관, 국가생태산업단지 조성 등 대안 사업을 마련하였다.

2007년 참여 정부가 ‘지속 가능 발전과 쾌적한 환경 조성’을 국정 과제로 삼으면서 서천군의 대안 사업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2013년 서천군 마서면 송내리·덕암리·신포리·장선리 일대에 국립생태원이 개원하였으며, 2015년에는 서천군 장항읍 장항리·화천리·송림리 일원에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이 개관하여 서해안 시대 생태 도시로의 발전을 지향하고 있다.

[사회]

6·25전쟁 당시 서천에서는 장항농업중학교 학생들은 반공결사단을 조직하여 북한군에 대항하였고 군사 정보를 수집하여 유엔군에 전달하였다. 한편, 이승만 정권 독재를 종식시킨 4·19혁명에서 서천국민학교서천중학교, 장항농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노희두(盧熙斗)가 1960년 4월 19일 경찰의 총탄에 희생되는 비극도 있었다.

1947년 말 서천군 인구는 13만 명이었으며 1966년에는 16만 1159명으로 증가하여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80년 12만 9000명으로 감소하였고 1990년 10만 명, 1998년 8만 명 선이 무너졌다. 사회적으로는 농업 인구가 점차 줄어 1971년부터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농촌 환경을 개선하는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 와중에 종천면 면장 노승문(盧承文)이 과로로 순직하는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1983년 12월 착공되어 1990년 11월 완공된 금강하굿둑으로 서천을 비롯한 충청남도, 전라북도 일원에 공업용수와 농업용수가 공급되었다. 그러나 수질이 나빠지고 멸종하는 생물도 있었으며 이전에 번성하던 포구도 쇠락하였다. 서천 군민들은 현재에도 금강하굿둑의 생태계를 살리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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