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현 제민창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425
한자 庇仁縣 濟民倉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장구리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행 시기/일시 1763년연표보기 - 비인현 제민창 건립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장구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진휼 창고.

[개설]

조선 후기 정부는 가뭄과 폭우 등으로 흉년을 당하게 되면 기민이 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을 실시하였다. 수시로 기근이 발생하는 지역인 함경도, 강원도, 제주도를 대상으로 먼저 진휼 창고를 설치하였고, 그 밖의 지역인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도 기민 구제를 위한 창고를 설립하였다. 1763년(영조 39) 삼남 지역에 제민창을 설립하였다. 경상도에는 포항과 사천, 전라도에는 순천과 나주에 각각 제민창을 설치하였다. 충청도에는 비인현에 제민창을 설치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비인현 제민창(庇仁縣 濟民倉)은 진휼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비인현 백성들만을 위한 창고는 아니었고 충청도 지역 전체 백성을 대상으로 하였다. 비인현의 제민창은 비인현이 바다에 접하여 수로를 통하여 충청도 서해안과 금강의 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매우 컸다. 제민창의 설립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당시 충청감사였던 윤동승(尹東昇)이었다. 윤동승이 지은 창건기가 1872년 편찬한 『비인현읍지(庇仁縣邑誌)』에 남아 있다. 창건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리가 매우 만족스러워 만약 조수 간만을 기다리면 포구가 넓어져서 배가 정박하고 왕래하는데 편리하고, 사방의 지세가 한 아름으로 읍을 감싸고 있어 장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형세이다.”

[관련 기록]

비인현 제민창의 운영과 관련 기록은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수록되어 있는 ‘호서제민창절목(湖西濟民倉節目)’에 상세하게 남아 있다.

[변천]

1764년(영조 40) 2월,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장구리에 제민창이 터를 닦기 시작하였다. 장구리에 남아 있는 ‘제민창비’를 통하여 위치를 알 수 있다. 제민창비에 따르면, 비인현 제민창은 1764년 5월 준공되었다. 나무 1,300주, 철 1,700근, 돈 2,200냥, 쌀 390석이 들었으며, 장인 16명과 인부 1만 2000여 명이 투입되었다. 창고는 37칸이었다. 설립 당시에는 3만 석이 확보되어 있었는데, 매년 3등분하여 2/3는 창고에 남겨 두고 1/3은 부근의 군현에 분급하여 환곡으로 운영하였다. 남포, 서천, 홍산, 한산, 비인이 해당 군현이었다. 매년 이자를 확보하였으며, 늘 제민창이 3만 석이 유지될 수 있도록 운영하였다. 이자로 확보한 곡물 중 1/5은 창고와 담장 수리비로 사용하였다. 비인의 제민창이 언제까지 운영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제민창의 관리는 본래 감사가 맡았으나 이후 관리 권한을 비변사로 옮겼다. 19세기 다소 기능은 줄어들었으나 기민을 구제하기 위한 본래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았다. 비인현에 설치된 제민창은 충청도 백성들을 위한 중요 진휼 창고로서 서천 지역이 가지는 역사 지리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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