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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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場 |
이칭/별칭 | 새장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범 |
관할 지역 | 신장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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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에서 열렸던 조선 시대 오일장.
[제정 경위 및 목적]
장시 는 15세기 말 전라도 지역에 처음 개설되었다. 물산이 풍부하고 교통이 발달한 지역에서 장시가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고 상업 교통망이 형성되면서 19세기 전반에는 1,000여 개의 장시가 전국에 개설되었다. 특히 한산군 지역에는 저포를 매개로 보부상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신장(新場)은 그러한 주된 무대 중 하나였다. 한산군 지역에는 한산 읍내장과 신장이 주요 장시로 기능하였다. 구체적으로 언제 장시가 개설되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18세기 후반 장시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부터 신장이 확인된다.
[관련 기록]
신장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동국문헌비고』를 비롯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한산읍지(韓山邑志)』,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1872년 지방지도』, 『통상휘찬(通商彙纂)』 등에서 신장의 개설을 기록하고 있다.
[내용]
신장은 새장터라고도 불렀으며, 18세기 후반 이래 3일과 8일에 장시가 열렸다. 20세기까지 장시일이 변동된 적은 없다. 신장의 위치는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일대이며, 서천군 장시 중에서 거래량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신장에서는 한산모시와 소가 많이 거래되었다. 1913년 간행한 『충청남도통계연보』에 따르면, 장시 거래액은 18만 4015엔이었다. 서천군의 읍내장이 10만 9200엔이고 비인군의 판교장이 9만 3419엔인 것과 비교하여 신장의 거래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신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1919년 3월 29일 일어난 ‘신장 3·1 운동’이다. 신장이 서천 지역에서 가장 거래량이 많은 장시인 것을 고려하면 상인과 소비자 등 장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만세 운동의 최적지였던 셈이다. 당시 2,000여 명이 운집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부 사람들은 마산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참여자들은 한산면의 모세다리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신장은 한산군 지역을 넘어서 현재 서천군 내에서 가장 물품 거래가 많았던 장시이다. 서천군 경제의 주요 거점이었던 셈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 3·1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신장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