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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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祠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 조선 시대 건물.
[개설]
조선 시대에 지어진 사묘(祠廟)는 선조나 선현의 신주 혹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 건물을 말하며, 사우(祠宇), 향현사(鄕賢祠), 향사(鄕祠), 영당(影堂), 별묘(別廟), 세덕사(世德祠) 등으로 불리었다. 사묘는 선조나 선현의 숭배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사묘는 고려 후기~조선 전기 주자가례의 실천이 본격화되면서 확산되었다.
[조선 전기의 사묘]
조선 전기 사묘의 모습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자세하게 나타난다. 주로 수령권의 강화 속에서 지방 지배의 효과를 거두기 위한 군현 제의가 제도화하는 과정 속에서 사묘가 강조되었다. 사직단, 성황사, 여단, 문묘가 있었다. 사직단은 농사를 짓는 데 가장 주요한 토지신인 사(社)와 곡식을 담당하던 후직에게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을 말한다. 여단은 돌림병을 막기 위하여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을 국가와 지방에서 달래 주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성황사는 산천, 성황, 뇌우, 풍운 등과 같이 여러 단을 하나의 성황사로 수렴하여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사직단의 경우 한산, 서천, 비인 모두 읍치 서쪽에 있었다. 성황사의 경우 한산은 읍치 서쪽, 서천은 옛 읍성 안, 비인은 현 동쪽에 있었다. 여단의 경우 한산, 서천, 비인 모두 읍치 북쪽에 있었다. 사직단과 여단은 일정한 방향성을 갖추어 제단 공간이 마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천 지역에는 3사 이외에 용당진사(龍堂津祠)가 있었다. 서천 읍치 남쪽 24리[약 9.43㎞]에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 시대에 웅진명소(熊津溟所)라고 불리며 국가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보냈다고 한다. 이는 금강에 대한 산천 제사였다. 1437년(세종 19) 예조에서는 산천 제사에 대한 제도를 정하면서 웅진명소의 위판에 ‘웅진명소지신(熊津溟所之神)’이라고 지칭하였다. 문묘는 향교의 대성전을 가리킨다.
[조선 후기의 사묘]
조선 후기 사묘의 가장 큰 특징은 사당이 본격적으로 창설되었다는 점이다. 창건이 오래된 사당으로는 효정사가 있다. 목은 이색의 5대손 이유청이 이색의 영정을 모사하여 이색의 묘소 아래 분암인 영모암에 봉안하여 두었다. 그러다가 한산군수 이성중과 지방 유림의 공론에 따라서 영모암 인근에 1594년 효정사를 건립하였다.
화산사는 안동 권씨 권변과 권성의 영정을 봉안하던 사당이었다. 지역 사림들과 문인들에 의하여 화양면 구동리에 건립되어 향현사로 불리었다.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는 목은 이색 영당이 있다.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한산 영모암에 봉안하였던 영정으로 추정된다. 서천군 비인면 구복리에는 비인 출신의 구황을 제향하는 검산사가 있다. 1844년 비인 지역 능성 구씨가 건립한 문중 사당이었다. 서천군 비인면 남동리에는 비인 지역의 기계 유씨 문중 사우로 유기창을 주벽으로 하고 기계 유씨 4인의 위패를 제향하는 서천청절사[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가 있다. 서천군 비인면 율리에는 평산 신씨의 문중 사당으로 신숭겸을 비롯하여 신현, 신혼 등 7위를 배향한 세덕사가 1851년 건립되었다. 세덕사는 1900년 율리사[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개칭되었다. 한산면 원산리에는 1897년 건립된 경주 최씨 문중 사우인 도충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