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0380
한자 周留城
이칭/별칭 주유(州柔),두솔성(豆率城),두량윤성(豆良尹城),두량이성(豆良伊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기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663년 9월 7일 - 주류성 나당 연합군에 함락

[정의]

백제가 멸망한 660년부터 663년까지 백제 부흥 운동의 근거지였던 성.

[명칭 유래]

주류성(周留城)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에 주류성으로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주유(州柔)로 나온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는 두솔성(豆率城)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두량윤성(豆良尹城) 또는 두량이성(豆良伊城)이 주류성과 같은 곳이라는 견해도 있다.

[형성 및 변천]

백제의 부흥 운동은 처음에 흑치상지(黑齒常之)와 귀실복신(鬼室福信) 등이 임존성(任存城)을 근거로 삼고, 도침(道琛)이 주류성을 근거로 삼아 세력을 모았는데, 곧 주류성을 중심으로 통합하였다. 백제 부흥군은 660년 9월과 661년 2월 2회에 걸쳐 사비도성을 공격하고 200여 성을 회복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그리하여 662년 5월에는 왜국에 머물고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왕으로 맞아들이고 왕조를 복원하는 듯하였으나, 부흥군에서 권력 쟁취의 내분이 일어나 혼란스러워졌다. 이에 신라군을 주축으로 한 나당 연합군이 663년 8월 17일 주류성을 에워쌌으며, 당나라의 전선(戰船) 170척은 바다를 건너오는 왜국의 지원군 1만여 명을 맞아 싸우기 위하여 백촌강에서 신라 기병과 함께 진을 쳤다. 8월 27일부터 다음 날까지 이어진 4회의 전투에서 당나라 수군이 왜군의 배 400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도 붉어졌다.”라고 할 정도로 왜군이 궤멸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671년(신라 문무왕 11)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이던 중 문무왕이 당나라 총관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실려 있다. 문무왕이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왜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서, 왜의 배 1,000척은 백강에 정박하여 있고, 백제의 정예 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는데, 신라의 용맹한 기병이 중국 군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지를 깨뜨리니 주류성에서는 간담이 서늘하여져 곧바로 항복하였다.”

주류성이 항복한 날을 『일본서기』는 663년 9월 7일이라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은 663년 9월 8일이라고 하였다. 주류성에 있던 왕족 부여충승(扶餘忠勝)·충지(忠志) 등과 인근의 부흥 운동 세력이 모두 항복한 뒤에도 지수신(遲受信) 등 일부 세력은 임존성을 지키며 저항하였으나, 663년 11월경 당에 항복한 백제 장군 흑치상지와 사타상여(沙咤相如)가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임존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로써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주류성의 위치에 대하여 부안설[위금암산성], 서천설[건지산성 등], 연기설[운주산성], 홍성설[학성산성 등], 청양설[계봉산성] 등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다. 서천 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는 다시 건지산성추동리 유적 주변 지역에 주목하는 견해, 비인면관적곡산성에 주목하는 견해, 기산면한산면 경계의 영모리산성 등에 주목하는 견해로 나뉜다.

[관련 기록]

『일본서기』에 천지(天智) 원년 12월 1일 백제왕 풍장(豊璋)과 좌평 복신(福信) 등이 의논하면서 “이곳 주유는 논밭과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다. 농사짓고 누에 칠 땅이 아니라 방어하고 싸울 장소이다. 여기에 오래 있으면 백성이 굶게 될 것이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험준한 곳에 있어서 방어하기 아주 좋고, 산이 험하고 높으며 계곡이 좁아서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낮은 곳에 있었다면 어찌 굳게 지키며 동요하지 않고 지금까지 왔겠는가.”라고 지리적 특성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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