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50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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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서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광호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10년 2월 9일 - 「이인손의 묏자리와 비기」 이돈직에게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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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5년 12월 8일 - 「이인손의 묏자리와 비기」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4-8-충청남도 서천군에 수록 |
관련 지명 | 서천읍 -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
관련 지명 | 세종대왕릉 -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 901-3 |
채록지 | 군사리 -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 |
성격 | 설화|풍수담 |
주요 등장 인물 | 이인손|지관 |
모티프 유형 | 명당과 욕심과 금기 |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에서 이인손의 묏자리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이인손의 묏자리와 비기」는 조선 시대 문신인 이인손(李仁孫)[1395~1463]의 묏자리를 쓸 때 지관이 금기 사항을 일러 주었으나 자손들이 금기 사항을 어겨서 명당자리에 세종(世宗)[1397~1450]의 능(陵)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풍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이인손의 묏자리와 비기」는 2010년 2월 9일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 주민 이돈직에게 채록하였다. 2015년 12월 8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4-8-충청남도 서천군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조선 시대 문신 이인손의 처음 묏자리는 원래 천하의 명당이었다. 지관이 좋은 자리를 잡아 주면서 “여기에 재실을 짓거나 집 한 칸도 짓지 말고, 개울에 돌다리도 놓지 마라.”라며 당부를 하였다. 이인손의 집안은 아주 융성한 집안이었다. 그런데 자손들이 산소에 다니다 보니, 비라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재실을 지었고, 강을 편히 건너고 싶은 마음에 다리도 놓았다. 지관이 말한 금기 사항을 어긴 것이었다.
그 무렵 세종을 모신 자리가 좋지 않다고 판단한 조정에서 천하 명당을 찾기 위하여 파견한 국지사(國地師)가 경기도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국지사가 북등산이라는 큰 산에 올라서서 살피니 좋은 자리가 보여서 산 아래로 내려와 정확한 위치를 찾았다. 해 질 무렵 소나기가 내리고 개울이 넘칠 정도로 흘러내리자 국지사는 다리를 건넜고, 마침 재실이 눈에 띄어 안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하였다. 날이 개고 난 후에 보니, 눈앞에 보이는 이인손의 묏자리가 바로 명당자리였다. 만약 개울을 못 건넜거나, 재실이 없었더라면 국지사가 명당자리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세종의 능을 옮겨 오기 위하여 이인손의 묘는 다른 곳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후손들이 이인손의 묘를 이장하려고 땅을 파 보니 “여기에서 연을 날려서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장을 하면 된다.”라는 비기(祕記)가 있었다고 한다. 이인손 묘의 이장은 운명으로 정하여져 있었던 것이다.
[모티프 분석]
「이인손의 묏자리와 비기」의 모티프는 ‘명당과 욕심과 금기’이다. 이인손의 묏자리는 명당이었으나 자손들이 지관이 말한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천하의 명당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과한 욕심이 화를 불러온 것이다. 실제로 이인손의 묘를 이장한 이후에 집안의 가세가 점차 기울었다고 한다. 이장의 운명을 담은 비기와 세종의 능을 옮긴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이인손의 묏자리와 비기」는 풍수지리의 신이성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풍수 이론을 대하는 조선 시대의 시각을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