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501142
한자 將帥窟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용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중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90년 - 「장수굴」 서병렬에게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9년 - 「장수굴」 『서천군지』 4권에 수록
관련 지명 장수굴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온동리 봉황산지도보기
채록지 용산리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용산리지도보기
성격 전설
주요 등장 인물 백제 장수
모티프 유형 백제 멸망의 기억

[정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온동리에 있는 봉황산 장수굴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장수굴」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온동리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바위굴에 대한 전설이다. 봉황산 바위굴은 장수가 살았다고 하여 ‘장수굴’이라고 불린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멸망 무렵 한 백제 장수가 당나라 군대와 맞서 싸웠는데, 백제가 멸망한 뒤에 봉황산에 있는 굴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장수가 다시 나타나 왜군을 물리쳤으므로 이 지역에는 왜군이 쳐들어오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채록/수집 상황]

「장수굴」은 2009년 서천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서천군지』 4권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용산리 주민 서병렬로부터 채록하였다.

[내용]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용산리 화산(花山) 정상부에 해당하는 산인 봉황산은 서천 일대에서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봉황산에는 산신당과 용당이 함께 있었는데, 이처럼 신령스러운 산을 지키기 위하여 살았던 장수가 거주하였다고 전하여지는 큰 바위굴이 있다. 바위에는 팬 곳이 세 군데나 있는데, 장수가 칼을 꽂았던 흔적이라고 전하여진다. 봉황산 바위굴은 장수가 살았다고 하여 ‘장수굴’이라고 불린다. 장수굴의 바위에는 움푹 패여서 옹달샘처럼 늘 물이 괴어 있는 곳이 있는데, 장수가 오줌을 누었던 흔적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장수는 백제 멸망 무렵에 당나라 군대가 침범하자 밤낮없이 쳐들어오는 당나라 군대를 무찔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당나라 군대가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세상이 다시 바로 서면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굴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 때에는 장수가 다시 나타나 왜군을 물리쳤으므로 이 고장에는 왜군이 쳐들어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노인들 중에는 지금도 장수굴 바위가 계속 자라면서 커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모티프 분석]

「장수굴」의 주요 모티프는 ‘백제 멸망의 기억’이다. 이야기에는 당나라 군대와 왜군을 물리친 백제 장수가 등장하고, 장수가 살았다는 바위굴이 나온다. 이야기가 전하여지는 서천군 한산면 용산리 일대는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인데, 당나라 군대가 백제로 진입하기 위하여 거쳐야 하였던 관문이었다. 봉황산 중턱에 자리 잡은 커다란 바위굴이 백제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던 장수의 거처로 인식된 것은 일대에서 전개된 치열한 전쟁의 기억과 전승이 거대한 규모의 바위굴에 투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이렇게 인식된 장수는 백제 장수로 끝나지 않고 임진왜란과 같이 외적의 침입에 의하여 국가와 백성이 위기에 빠질 때 다시 나타나 지역을 지켜 주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장수굴과 장수가 늘 살아 있는 지역 사회의 수호신으로 여겨졌음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